여름 시리즈
너와 함께 걷는 길에 탄생한 저녁이 있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여름 속을 걸으며 네 그림자를 밟았다. 벗어나고 또, 벗어나는 그림자 속에서 나는 네게 무심코 천천히 걸을 수 있느냐 물었고, 너는 이보다 더 천천히 걸을 순 없다며 웃었다. 네 웃음에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고 속도를 늦춘다 하더라도 너는 늘 나보다 앞서 있었다. 여전히 반대의 시간 속에 놓인 채로 앞서서 걷는 너를 떠올린다. 수없이 쏟아지는 것들이 너의 말인지, 이제 막 물든 나뭇잎의 시작인지, 이 여름의 시작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시작인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피곤한 두 눈 위로 떠오르는 네 얼굴이 있다. 얇고 가냘픈 네 얼굴. 여름을 알리는 유월의 비. 발등 위로 튀어 오르는 빗방울과 작게 고인 빗물, 그 웅덩이에 검지를 찍어 네 얼굴을 그렸다. 손 끝에서 그려지는 네 얼굴.
네 이름 끝에 탄생하는 것을 생각했어. 내 곁에 있으면서도 너무 멀리 있는 것들. 언젠가 바라보았던 밤바다를 떠올린다. 모래사장에 툭툭 앉아 있는 사람들, 그 사이로 발자국을 깊게 찍으며 파도의 자국을 따라 걸었다. 파랗다면 파랗고, 검다면 검었고, 투명하다면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곁에 있으면서도,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던 파도. 저 멀리서부터 바람에 따라 이곳까지 도달한 파도는 바람의 모양을 닮았을까. 목덜미와 손등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짠맛이 난다. 흐릿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점점 더 강렬해지는 파도 소리. 저 수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결국 바다일 것 같아.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는 것들. 가늠할 수는 없어도 짐작은 해볼 수 있는 것들. 깊고 깊어진 마음들 너머로 네가 보인다. 결국 너다.
내 곁에 있을 것도 같으면서 영영 내 곁을 머물지 않을 너를 떠올린다. 여름비 속에서 무심히 너를 생각하다 바다를 생각하고, 그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을 너를 떠올린다. 뿌리내린 마음은 어디까지 이어지게 되는 걸까. 동그란 불빛이 내린 골목 사이를 걷다 너와 함께 본 오래된 나무를 기억한다. 높고 울창해서 너와 나는 고개를 한껏 젖히고 하늘보단 낮고 우리보단 높은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흩어지던 밤의 조각들, 약속이라도 하듯 걸고넘어진 손가락들. 초침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던 순간 속에서 너는 바다의 깊이처럼 계속해서 깊어져 갔다.
짙어진 초록들 사이로 빗물이 더해진다. 툭하고 발등 위로 떨어진 빗방울을 보며, 등 뒤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떠올렸다. 그곳에도 비가 내릴까. 바다에 닿은 빗방울은 곧 바다가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여름은 오고 너는 떠난다. 네가 없어도 비는 내리고 파도는 치며 수평선 너머의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