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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문 Sep 27. 2023

파란 속이었을

여름은 그저 내게 파란(波瀾)이었다 반짝이는 것들에 오래 시선을 두지 못하고 흔들리는 그림자를 더 자주 바라보았다 짙은 초록으로 넘실거리는 나뭇잎의 끝이 유난히 반짝거려 눈이 시렸다 하늘을 바라보다 정면을 바라보다 끝내는 발끝을 바라봤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고 정해둔 적도 없었다 아무렇게나 내버려 둬서일까, 발끝을 오래 바라보다 그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그림자를 바라봤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고개를 들지 않고 땅만 바라봐도 알 수 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그림자도 그 흔들림에 맞춰 함께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은 그렇게, 자주 흔들렸다


여름은 흔들렸고, 나는 그런 여름 속에서 숨을 참고 걸었다 너무 자주 참아서 그랬을까 때론 숨을 쉬는 것도, 걷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누워 있던 날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의 연속이었고, 어느 날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 바람이 빈 입 속으로 가득 차 올랐다 삼켜내지도, 뱉어내지도 못한 그 바람은 목구멍 사이사이에 자리 잡아 숨을 쉬는 법도 잊어버리게 했다 으깨지고 부서지고 싶다는 나의 염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대로 괜찮은 건 없었고, 그럼에도 괜찮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가장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쳐도 나는 아직 여름이었다 이 계절은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질 않는다 가장 소중한 것을 내 목숨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는다 사실 한 번도 내 목숨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이 여름 속에서 그것만큼은 확실해서, 그 확신이 나를 살게끔 한다


무너져가는 이 여름 속에서 나는 좀처럼 무뎌지질 않는다 떨어지는 나뭇잎에 온몸이 베이는 상상을 한다 살이 떨어지고 그러다 보면 팔이, 다리가, 머리가 조금씩 깎이고 깎여 가을이 오면 수북이 쌓인 나뭇잎 안으로 파묻히게 될까 그럼에도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내 몸이 아니라 내 머릿속을 깎고 깎아야 이 생각을 멈추고 다음 계절로 넘어갈 수 있을까 하루하루 확신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두 눈을 고요히 감고서 여름에 남겨두고 싶은 것들을 떠올린다 파란으로 가득한 이 여름을, 내가 어떻게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송두리째 잊고 싶은 이 여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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