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벌써 3주째, 주말 집콕 중인 나에게 넷플릭스는 마른하늘의 단비와도 같다. 평소처럼 무슨 영화를 볼까 목록을 훑어보던 중, <82년생 김지영>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가 개봉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창 이슈였던 이 영화를 나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동명의 원작 소설 또한 마찬가지로 일부러 보지 않았다. 주변의 몇몇 친구들은, 불편한 진실이더라도 마주해야 한다. 꼭 읽어봐야 한다. 책이 읽기 싫으면 영화라도 봐야 한다면서 강요했지만 그런 그들의 강요와 의무감이 영화와 소설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다.
내가 이 영화는 절대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속 한 장면 때문이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 영화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에서 잠시 보여주었던 장면인데, 그것은 바로 지영이가 설 연휴 때 시댁에서 처음으로 병세를 보이던 장면이었다. 그 장면 속의 지영이는 꼭 우리 엄마를 닮아있었다. 우리 엄마는 매 해 명절 때마다 고모를 친정에 일찍 보내주지 않는다며 고모의 시댁 식구 욕을 하는 친할머니께 과일을 깎아드려야 했다. 친정에도 못 가고.
나는 명절이 싫었다. 어린 나이에도 친가 댁에서 엄마를 대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지 나는 항상 명절이 되면 친가 댁인 대전에 가야 하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어떤 때는 명절 연휴 내내 말을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 적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 영화를 멀리한 것은 내가 늘 보고 들어왔던 현실을 왜 굳이 영화 속에서까지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문득 '한 번 봐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고 나는 맥주 한 캔을 까고 앉아 영화를 시청했다. 영화는 제목에 걸맞게 82년생인 김지영이라는 사람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일상은 곧 나의 일상이자 우리 엄마의 일상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도 겪었던 일이고, 내일 당장 사무실에 출근하면 내가 맞닥뜨릴 일이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아마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시대는 성평등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시기이다. 남성의 육아휴직을 보장한다는 대기업 광고부터 시작해서 육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는 공익광고가 등장하고,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을 다루는 콘텐츠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용기 있는 누군가의 노력들 덕분임을 알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단녀, 유리천장, 독박 육아, 몰카, 성추행 사건 그리고 소소해서 말로 다 하지 못할 차별까지도 너무나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나를 떠올려본다면, 아직은 부족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일상이 어딘가 잘못되어있음을 계속해서 노출시키고 인지시켜야 한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던 그 시절에는 그것이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었을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고백한다. 이 영화를 접하기 전, 나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차별 없이 똑같이 대우해달라 소리치는 그들을 보면서 육체적, 물리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불평등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탈코르셋' 하겠다며 숏컷을 시도하는 친구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본 적도 있었고 '여자라서 당했다.'는 말 또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의 논리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페미니즘 운동을 유난스럽다 여기며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극 중 지영이의 딸 아영이 때문이었다.
'여자가 그럼 못써!' '여자가 좀 조신해야지.' '너는 여자가 되가지고 그렇게 선머슴같이 굴면 어쩌니.' 93년도에 태어난 나 또한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왔고 우리 사무실 과장님께서는 항상 '여성분들'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회의가 있거나 외부 손님이 오시면 차를 타기 위해 일어나는 사람은 과장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여성분들' 뿐이고 도무지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가 없는 화장실 몰카범들 때문에 아주 급할 때가 아니면 바깥에서는 화장실을 절대 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나 또한 이런 일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무감각해진 지 오래다. 왜 난 이렇게 항상 피해 봐야 해? 하는 생각을 갖게 되면 나만 스트레스받고 속만 상하니까 그냥 모든지 좋게 좋게 생각하자 다독이며 살아왔다. 불합리한 것을 바꿀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고.
그런데 영화를 보다 문득 '그러고 보니 아영이도 딸이네.'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다음 세대가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게 하지 않으려면 내가 지금부터 노력해야 하겠구나, 우리 세대에서 바꿔야 할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다음 날 바로 서점으로 가서 동명의 원작 소설과 함께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몇 권 구입했다. 최근 뉴스를 접할 때마다 n번방 사건을 비롯하여 사회에 만연한 각종 성추행 사건들까지, 아동을 포함한 여성을 상대로 한 성범죄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분노에 휩쓸려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남자라면 무조건 이럴 거야.' , '저 사람은 남자라서 절대 이해 못해.'라는 식의 편협한 사고를 쌓아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페미니즘이 진정한 성평등을 위함이 아닌 다른 의미로 변질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즘이 여성 우월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다음으로 내가 실천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바로 '표현하기'이다. 평소 회의 때마다 매번 여자들이 차를 타는 것이 불만스러웠다면, 회의 때 자기가 마실 차는 각자 타오는 건 어떨지 제안한다거나 사무실 직원들의 기분 나쁜 성적 농담을 예전에는 그냥 웃어넘겼다면 그런 표현은 기분이 나쁘다고 확실하게 내 의사와 기분을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해와 배려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에서처럼 역지사지로 내가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는 한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이 되어볼 수 없다면, 나의 입장이 어떤 지를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상대의 입장도 들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더욱 좋고. 상식적이라 여겼던 것들에 대하여 그것은 비상식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면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둘째 치더라도 그것에 대해 한 번 고민해볼 시간을 줄 수는 있다. 그 시간들이 차츰차츰 쌓여간다면 어느샌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엇이든 급하게 하려고 하면 어그러지기 마련이다. 조금씩 천천히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어가듯이. 그렇게 바꾸어 나가면 된다. 보면 속만 터질 거라 생각해서 영화도 책도 거부했던 내가, 직접 서점에 들어가 페미니즘에 관련된 책을 찾고, 나 스스로부터 변해보고자 노력하게 된 것처럼.
82년생 지영이는 93년생 지영이에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물려주었다.
93년생 지영이는 03년생 지영이에게 어떠한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