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평
위로가 돼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주인공 엘리오의 인생은 얄밉도록 완벽해 보입니다. 태생부터가 여러 인종이 섞인 코즈모폴리탄에다 고고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지적인 소년으로 자랐죠. 주변 인물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대하고요. 무엇보다도 그림같이 수려한 외모를 지녔습니다. 게다가 엘리오의 무대는 끝내주는 경관의 이탈리아 크레마예요. 그의 판타지 세상엔 날파리가 꽃가루처럼 퍼지고 목덜미에 맺히는 땀에선 살구즙 향기가 납니다. 온 지구는 그의 편으로 보여요. 모든 게 그를 아늑하게 보살피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첫사랑이 다가오기 전까지는요.
어느 여름날 엘리오 가족에게 연구원 올리버가 찾아옵니다. 엘리오는 근사하고 총명한 이방인에게 자신도 모르게 매혹되죠. 열일곱 소년은 사랑이 처음입니다. 푹신한 꽃밭에서만 구른 꼬마에게 이 강렬한 감각을 제어할 굳은살은 없죠. 자연히 엘리오는 사랑에 사로잡힌 자들이 하는 고전적인 삽질들을 차례대로 이행합니다. 감히 자기 마음을 훔쳐간 재수 없는 미남자를 힐난하기도 했다가 수 얕은 책략으로 관심을 끌어보려고도 하고, 부대끼는 충동에 몸을 부비며 사심을 채워보기도 해요. 엘리오는 다 알고 싶고 전부 갖고 싶고 차라리 모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반면에 올리버는 사랑에 처음이 아닙니다. 소수자로서 차별에 부딪혀본 적도 있죠. 때문에 엘리오와의 퀴어로맨스가 봉착할 난경에 대해서도 얼추 가늠합니다. 이 같은 감정이 언젠가 끝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의 주저함은 사랑의 한시성에 저항하는 본인만의 방식입니다. 어떤 건 흘려보내야만 영원하다는 것까지 깨달은 도통한 총각이에요.
대등하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은 운을 떼자마자 완결됩니다. 여름은 저물어 올리버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죠. 그는 엘리오를 애정하지만 이미 어른입니다. 잘 익은 달걀을 원 없이 먹고 질리기 전에 하나만 음미하고 절제하는 법을 배웠죠. 그러한 현명함은 야속하게 올리버를 떠나는 기차에 태웁니다. 엘리오는 인생 최초의 실연에 맥을 못 추죠. 사랑에 빠진 지 얼마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세상은 완전히 변해있고 죽을 듯이 괴로워요.
올리버 없이 계절은 겨울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엘리오의 집에 전화가 걸려와요. 수화기에선 올리버가 오랜 연인과 결혼한다는 비보가 들리죠. 엘리오는 벽난로 앞에 웅크려 울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버린 여름의 온기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지나치게 이상적입니다. 적확한 심리 묘사에 기억을 담당하는 뇌 한쪽이 저릿하다가도 미끈한 주인공들을 보다 보면 이입하는 것이 스스로 뻔뻔하게 느껴져요. 하나 작품의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정당한 연출입니다.
영화는 제시합니다. 모든 값이 유리하게 입력된 환상적인 세계에서도 사랑은 간편하지 않고 상실은 우리에게 깊은 아픔을 준다는 변치 않는 진리를요. 또한 그 못생긴 고통이 사춘기에서 벗어나 성인으로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도 숭고하고 위대한 삶의 정점으로 남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위로가 돼요. 우리의 찬연하면서 구차스러운 지난날이 결코 혼자만 붙들고 있는 외로운 멍에가 아니라는 것. 저 유러피안 프린스 챠밍에게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