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2일 (에세이)
연옥으로 가는 길은 내내 고요하였다. 다들 시끄럽던 이승의 삶은 까맣게 잊은 듯 얌전하였다. 나는 요란하게 기분이 설렜다가 염려도 들었다가 결국 끝이라는 생각에 평안을 되찾았다. 도착할 즈음에는 노곤하니 하품까지 하였다. 나는 애써 졸음을 삼키고 사람들을 따라 줄을 섰다. 줄을 기다리는 동안 변명거리를 궁리하다 저승까지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금세 내 차례가 왔다.
심판대 앞에 선 염라대왕은 상상과 다르게 시시한 모습이었다. 붉고 무서운 야수로 짐작했는데 덥수룩한 수염의 아저씨였다. 염라대왕은 내게 눈인사도 건네지 않고 치부책만 살피더니 기계적으로 물었다.
"너의 잘못은 무엇이더냐?"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모자람이나 보탬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찌 되었던 내 인생을 고백하는 자리이고 이런 순간까지 대충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할수록 생각이 어지럽게 뒤엉켜서 그냥 이제까지 살아온 버릇대로 포기해버리고 입을 열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입을 떼자 나도 모르는 말이 구역질처럼 토해졌다.
"저는 늘 그런 애였어요. 연신 발끝을 부비며 내심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주제에, 막상 제 이름이 불리면 놀란 체를 하며 미적거리기 일쑤였죠. 부끄럼이 많아서였을까요? 오만하고 영악스러운 성미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없어서 그랬으려나. 아마 어떤 이유건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요."
염라대왕은 도통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턱수염만 쓸어내렸다. 허약한 나는 겁을 먹고 말을 멈추려 했지만,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막진 못했다. 대신 소리를 줄여 저만 들리게 종알거렸다.
"저는 마음이 작아 미움받는 것을 못 견디었고, 샘은 또 많아서 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였고, 이겼어도 늘상 못내 아쉬워하였고, 어려운 허들은 어물쩡 넘기고 싶어 눈 돌리었고, 꾸물대다가도 중요한 문제는 대번에 포기해버렸고. 또..."
그러다 확신에 차 울부짖었다.
"그렇게 살다가요. 제가요. 나중에는 아무것도 짐 지고 싶지 않아서 끝내는 아무것도 쥔 것이 없는. 처량 맞은 행색으로 요행만을 바랄 뿐인. 도무지 처치곤란의. 그런. 그런 날. 그런 저를 벌하세요! 소중한 생을 낭비하였습니다! 살수록 폐가 될 뿐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또 미안합니다! 지옥에 가도 면목 없습니다!"
순간 염라대왕의 눈이 권태에서 벗어나 번뜩이더니 이내 게걸스레 웃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웃다 말고 비장하게 대답하였다.
"그곳이 곧 지옥이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