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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희망을 버려야 살 수 있다

엄마는 올해 환갑을 맞았다. 허겁지겁 살아오느라 엄마의 나이가 어느덧 환갑이 되었다는 것이 여전히 낯설다. 엄마가 40대 때 어땠더라, 50대 때 어땠더라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엄마의 40대, 50대, 60대는 내게 그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진 시간처럼 느껴진다. 40대부터 지금까지 그저 초지일관 고생만 하고 살았기 때문에. 팔자 좋은 여자들은 은퇴하고 여행 다닐 나이에 지금도 엄마는 하루 종일 가게 주방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한다. 그런 엄마에게도 내심 희망이라는 게 있었나 보다. 환갑이 되면 적어도 경제적으로 조금 숨통이 트이겠지, 심적으로라도 약간의 여유는 생기겠지 하면서. 엄마와 가장 밀접한 나에게도 그런 기대를 내비친적이 없었는데 막상 맞닥뜨린 환갑이라는 시기에 엄마는 또다시 기대와 다른 현실에 내심 좌절했다. 그 좌절감을 언뜻 내비친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엄마의 조심스러운 기대는 사실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후 대비는커녕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여전히 불안한 현실, 집을 말아먹고도 바람까지 났던 남편을 참고 데리고 사는 일,  우울에 또 음독자살을 시도할까 조마조마한 딸내미, 불안정한 직업에 아직 사회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나까지.  


"환갑이 되면 좀 나아질 줄 알았어"


사실 한참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을 때에 비하면 일정 부분 회복된 부분도 물론 있지만, 사실 죽을 만큼 노력해도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엄마가 재차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엄마가 안타까웠지만 새삼 엄마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희망이라는 게 있었구나 하며 내심 놀랐다.


문득 자각해 보니 나는 희망도 기대도 없이 산지 꽤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삶에 대해 완전히 비관하는 것은 아니다. 견뎌보니 시간이 해결해 주는 부분도 분명 있었고 내 노력으로 이뤄낸 것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죽을 만큼 노력해도 인생은 뜻하는 대로 흐르지 않으며,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진리에 매번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가끔 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제3의 존재가 내 삶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마구 주무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사니까 분명 더 잘될 거야 라는 희망은 더 이상 품지 않는다. 10대의 나처럼 "세상 사람 모두가 내 이름을 알게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같은 꿈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아니, 꿀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부푼 희망을 품고 맹렬히 노력했지만,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좌절의 경험이 더 많았다. 언젠가부터 나 스스로를 방어하려 기대도 희망도 내다 버리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삼십 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에게 그나마 작은 기대가 있다면 다음 달 카드값을 걱정하지 않고, 다섯 평짜리 원룸의 전세 대출 이자를 밀리지 않고 내는 것,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일을 해야 카드값도 대출 이자도 낼 수 있고 나는 빚을 지지 않고 다음 달을 살아남는 것이다. 어찌 보면 허울 좋은 이상이 아닌 생존이라는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에 더 묵묵하지만 악착같이 애쓰며 사는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희망', '기대'와 같이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긍정 에너지는 이미 고갈된 지 오래된 것 같다. 어른의 삶은 원래 이런 것인지 아직은 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희망도 기대도 잠시 버려두는 것이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적어도 실망과 좌절에서는 조금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그래야 내가 그나마 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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