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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남편은 이미 바람이 났다

내 기억으로 중학교 2학년 때 이후로 나는 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그 옛날 서자도 아니요, 계부 밑에 자란 것도 아니지만 한 집에 살아도 아빠라고 부를 일이 없을 만큼 그는 내게 물리적인 시간이나 감정의 깊이를 할애한 적이 없었다.


새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새 옷, 새 차, 그리고 사람도 새것을 참 좋아했다. 내가 외동이었을 때는 나를 참 예뻐해 주었는데 6살 때 여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는 그 사람의 온 신경은 새로 태어난 여동생에게 집중됐다. 누가 봐도 극명하게 한 자식만 티 나게 차별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듯이 어떤 시선도 나누어 주지 않았던 모습이 더 서글펐던 것 같다. 이 나이를 먹고도 우연히 길을 걷다 어떤 아빠들이 작은애는 안고 가면서 큰 애는 이방인처럼 그 옆을 따라 걷는 걸 보면 어린 나를 보는  같아서 마음이 저리다.


새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새 여자를 마다할 리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그의 첫 외도가 들통이 났다. 이게 정말 첫 외도였는지 이미 전적이 있는데 재수가 없어 걸린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가 우스갯소리로 그러더라. 바람은 들키고 안들키고의 차이 일뿐. 댁의 남편도 이미 바람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필사적으로 아빠의 외도를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눈치가 빨랐던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출장을 핑계로 홍콩에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때 출장에 다녀오면서 내게 빨간 필통을 사다 준 것이 기억난다. 어린 마음에도 그 선물을 받으면서 얼마나 가소롭고 환멸이 났는지 모른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엄마가 곧 이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고 나는 으레 엄마를 따라가서 살면 되겠거니 하고 있었다. 보통 아이들처럼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어떡하나 같은 걱정도 하지 않았다. 동생이 태어난 후 나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태도에 내 마음은 상할 대로 상해있었는데 여기에 바람까지 피우고 오니 오만정이 다 떨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아비의 공식적인 첫 외도 발각은 유야무야 없던 일처럼 되어버려 별거도 이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엄마도 옛날 사람이라 아비 없는 자식 만들기 싫었고 거지 같은 남편이라도 본인 보다 경제력이 있으니 애들 뒷받침할 수 있으니 참고 살았다. 종교인을 했어야 맞았겠다 싶을 정도로 유난히 올곧고 바른 엄마의 성품으로 봤을 때 진정 살을 찢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시절 내내 아비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은 일 년에 딱 네 번 정도였다. 분기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끝난 후. 평소에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대화도 걸지 않으면서 시험만 보고 오면 죽어라 나를 족쳤다. 여기에 엄마도 합세해서 부부가 나를 시험 결과가 나올 때마다 몰아쳤다. 밤새도록 부부의 족침을 받다가 처음으로 공황발작이 온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고 온몸이 굳어버려 쓰러지고 말았다. 지금이야 대중매체에서 정신건강에 대한 화두가 많이 알려지면서 대중들의 관심과 이해가 넓어졌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때마다 공황발작을 겪으면서도 어린 게 부모를 이겨먹으려고 발악하다가 지 분에 넘어갔다는 오명을 썼다.  

 

"너는 이 성적으로 전문대도 못 간다"

"유학을 가면 뭐 하냐 국제 미아가 되어 버릴 텐데"


내 중고등학교 시절에 내 아버지에게 들은 말 중에 지금껏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두 마디이다. 자식이어도 능력이 없으면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느끼고 이를 갈았다. 내가 미국에 가면 더 죽어라 공부해서 저 입을 쳐 막아버려야지. 오기와 분노로 미국에 떠났다. 영어도 못하는 애가 매일 밤을 새우며 악착같이 공부한 덕에 유학 간 첫 해에 모든 과목에서 A를 맞았다. 올 A를 맞고 한국에 돌아가 그가 내게 퍼부었던 악담들을 보기 좋게 반증하고 나니 그가 이제야 살가운 척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게 고소하면서도 또 한 번 환멸 났던 기억이 난다.


내 아버지와의 나쁜 기억이 이쯤에서만 끝나도 괜찮았을 텐데, 그와 나의 악연은 그 이후에 더 깊어졌다.

다음이야기에서 그와 나의 비극의 시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써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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