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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를 꿈꾸던 나, 쇼호스트가 되다.

팔자 더러운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나는 하필 코로나가 터지고 취업 시장에 던져졌다. 원래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로스쿨에 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학비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아 포기하고 귀국했다. 내 나이라면 군대 다녀온 시기를 감안해도 적어도 5년 전에는 이미 취업했어야 맞지만, 집이 망하고 11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느라 별 수 없이 서른두 살에 사회 초년생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취직을 못하고 백수로 지내고 있었으니 사회 초년생이 아닌 사회 잉여였다.


코로나로 시작된 경제 위기로 기업에서는 인원 감축을 해도 모자랄 판이라 신규 채용을 늘릴 상황도 아니었고, 코로나가 없었던들 대한민국 취업시장에서 서른두 살 먹은 중고 신입을 반길 곳은 현실적으로 없었다.


특수 직군이나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일반 기업은 일단 졸업연도와 생년월일에서 본인들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아예 서류 자체를 통과시키지 않으니, 나의 지난 11년 간이 아무리 파란만장이건 빨간만장이건 변명의 여지없이 아웃 처리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1년이 넘게 구직활동을 하면서 면접 제안을 받은 곳도 단 세 군데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업계 '최저' 수준의 연봉 조건으로 어떤 유학원에 입사하긴 했지만, 코로나라 하늘 길도 막힌 판에 유학원이라고 수 있나. 이미 책정되었던 최소 연봉을 삭감당하고 회사를 다니던지, 아니면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나는 1달 여만에 다시 실직자가 되었다.


'XX 진짜... 어쩌라고'


솔직히 진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라고 망해먹은 집안 뒤치다꺼리 하며, 바람난 애비 상간녀 잡으러 다니고, 우울증 약을 퍼먹으면서 11년 걸려 대학 졸업하고 싶었겠냐고.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한 번쯤 나 자신을 뒤돌아 보며 무엇이 문제인지 자아 성찰을 하기 마련인데, 나 같은 경우는 성찰의 단계를 넘어 자신을 하나씩 해부하다 결국 자아를 난도질하는 루트를 타곤 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문과라 그런가?'

'인턴 경력이 없어서 그런가?'

'인맥이 없어서 그런가?'

"학교를 한국에서 안 나와서 그런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아무도 정답은 알려주지 않는 나 자신과의 Q&A. 그 끝은 언제나 그랬듯 자기 비하로 끝났다. 아무리 대가리를 데굴데굴 굴려봐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답이 많고, 인간의 계획으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중독이라도  것처럼 나를 향한 가학을 멈추질 못했다.


코로나라 알바 자리조차 쉽게 구해지지 않아서 가뜩이나 돈도 없는 부모에게 기생하고 사는 기생충이 되어 버린 나. 아무리 코로나라지만 남들은 집에서 재택근무라도 하고 있을 시간에 쉴 새 없이 잡코리아와 사람인을 뒤지며 일자리를 찾아보고, 그 외 시간에는 멍하게 TV만 보고 있는 자신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은둔형 외톨이였다. 집이 망한 게 들키기 싫어서 친구부터 사촌들까지 모두와 절연하고 살던 시기였고, 당시에 유일한 친구라면 내 여동생 하나뿐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에게 화사한 미소와 따뜻한 말씨로 하루 종일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TV홈쇼핑 쇼호스트. 내게 말을 걸고, 웃어주고, 권유까지 해주는 이 사람들이 내게는 뭔가 친구 같았다. 버는 돈이 없으니 홈쇼핑을 보는 족족 구매를 할 수는 없었지만 살면서 이때처럼 홈쇼핑 채널을 많이 보던 시기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저거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 내고도, 내가 놀란 발상이었다. 중증 우울에 대인 기피로 치료를 받으며 은둔형 외톨이로 사는 내가 카메라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서른두 살이 되기까지 친구들과 사진 한 장 찍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인 사람이었고, 대학 시절 내내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뜬금없이 쇼호스트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홀로 방에서 쇼호스트들이 하는 방송을 따라 해 보기 시작했다. 쇼호스트 공채시험에서 많이들 시켜본다는 즉흥 PT (사전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주어진 상품을 판매하는 것) 연습도 해봤는데 스스로에게 엄격한 내가 봐도 생각보다 순발력도 있고,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동생에게 무작위로 아무 상품을 내게 제시해 달라고 하고, 상품에 대한 배경 지식이나 준비 없이 즉흥 PT 하는 연습을 해봤는데 의외로 당황하지 않고 센스 있게 판매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 이것 또한 주관적인 것일 수 있으니 들뜨지는 말자 생각했다.


이때부터 쇼호스트에 대한 정보를 마구 찾아보기 시작했다. 쇼호스트가 갖춰야 하는 요소들과 자격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의외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호스트 공채에서는 대부분 학력 제한이 없는 편인데 내게는 11년 만에 딴 학사 학위가 있으니 일단 무사히 통과, 쇼호스트를 발탁하는 데 있어서 공식적으로 연령 제한도 없어서 일단 지원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쇼호스트라는 직업이 자격 제한이 크지 않다고 해도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실제로 쇼호스트로 발탁이 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쇼호스트 학원에 상담을 가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쇼호스트 배출을 가장 많이 한다는 학원 두 곳에서 상담을 받기로 했다.


첫 번째 방문한 학원에서 상담을 받아 보니 당시 한국 나이로 서른세 살이라는 내 나이가 신입치고는 어린 나이도 아니지만 아예 너무 늦은 나이도 아니어서 해볼 만할 것이고,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와 음성을 가지고 있고, 키가 180cm 정도 되니 패션 방송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하게 직접 카메라 앞에서 즉흥 PT를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쇼호스트 아카데미 원장은 당시에 내가 입던 하늘색 코트를 팔아보라고 했는데 녹화된 화면을 다시 돌려봐도 의외로 떨지도 않고 술술 이야기를 나를 본 원장은 이런 제시를 했다.


"A 모 쇼호스트가 우리 학원 출신인데 그 친구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을 ㅇㅇ씨에게 받았어요. 장학금을 드릴 테니 우리 학원에 등록합시다"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쇼호스트로서의 자질이 나쁘진 않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 상담 예약해 둔 두 번째 학원이 아직 남아있으니 즉시 등록은 하지 않았다.


꽤 희망적인 마음을 안고 두 번째 학원에 갔다. 이곳은 쇼호스트 학원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곳이었는데 돈을 낸다고 아무나 받아주지도 않고 자체 오디션을 보고 원장 픽이 되어야 학원에 등록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홈쇼핑 공채시험도 아니고 내가 돈 주고 다니겠다고 하는 학원 오디션에도 뽑히지 못하면 이건 쇼호스트가 될 싹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디션 결과에 따라 이 직군에 도전할지 말지에 대한 판가름을 하기로 했다.


강의실에 한 열댓 명의 지망생들이 모여있었는데 한 명씩 돌아가며 즉흥 PT를 시켰다. 나는 순서가 뒤쪽이라 내 앞 순서의 지망생들이 하는 PT를 보았는데 '와 얘 물건이네' 싶은 지원자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내 차례가 왔다. 원장은 내게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을 팔아보라고 했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PT를 시작했다. 가격, 소재, 착화감까지 순서대로 PT를 마치고 났더니 원장이 얘 뭐지 하는 눈치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국에서 오신 분이라 잘하시나?"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미국에서 왔다고 다 쇼호스트가 될 순 없겠지만, 어쨌든 나는 대번에 학원에 합격했고 결국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두 번째 방문한 학원에 등록했다.


쇼호스트라는 직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로서 서른세 살의 중고 신입인 내가 나이 상관없이 뽑혀서 먹고살 수 있는 직업. 방송에 나오지만 연예인은 아니어서 유명세로 시달리거나 사생활 침해를 받을 일이 거의 없다는 점. 막상 해보니 이건 내가 타고났다 싶은 재능이 느껴지고 스스로도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일이어서였다.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며 대학 시절 내내 미국 로스쿨 진학을 목표로 하던 내가 쇼호스트를 꿈꾸게 되다니. 중증 우울병자에 대학 시절 내내 대인공포와 발표 공포증으로 고생하던 내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생글생글 웃어가며 카메라와 청중 앞에서 떨지도 않고 멘트를 하고 있는 게.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그런데 너무 재밌었다. 살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운이 조금만 닿으면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늘 찌질하게 나머지 공부를 하던 만년 열등생은 안녕. 쇼호스트 아카데미 안에서 나는 날개 돋친 사람처럼 뭘 시키던 선두권을 달렸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다니기 시작하고 약 100일쯤 흘렀을 무렵, 나는 모 홈쇼핑에 합격해서 공식적으로 '쇼호스트'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대학 졸업은 11년이 걸렸고, 취업 준비는 1년 반을 하고도 어디 하나 뽑히지 못했던 내가 쇼호스트라는 직업은 준비 100일 만에 덜컥 합격했다. 사람 길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인가 싶었다.


벼랑 끝에 있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벼랑 아래로 내 몸을 던져보기로 했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서 내 몸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지만, 벼랑 아래 내가 모르던 세상에 안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몸을 내던지게 되었다.


다음화에서 이어집니다.


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

다음 주 수요일 05월 22일 공개.

매주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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