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를 쓰던 동생이 갑자기 회칼을 들었다

내가 장장 11년을 대학 하나 졸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안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도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집이 처음 망했을 때 내 동생의 나이가 고작 열다섯. 이 불쌍한 것도 집이 망하는 바람에 미국에서 유학을 작파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부모 원망하는 소리 한 번 없이 묵묵히 한국 는 짐을 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동생의 친구들은 얘가 미국 생활에 흥미가 없어서 팔자 좋게 귀국한 줄 알았다. 당연히 우리 집 또한 과거에 살았던 아파트에 여전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창 사춘기였던 동생이 어른도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친구들에게 당당하게 드러내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만해도 그때 내 처지를 비관하며 자발적으로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으니까.


한국에 돌아온 동생은 원래 다니던 중학교로 복학하고 싶어 했다. 동생이 원래 다니던 중학교에 돌아가려면 우리 가족의 현재 거주지가 과거와 같은 학군 안에 있어야 했는데, 그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이미 남의 손에 넘어 간지 오래였고 수중에 있는 돈으로 같은 학군 내의 집을 고르자니 집의 상태는 암담 그 자체였다.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이때부터 동생의 등하굣길은 더욱 복잡해졌다. 동생은 아이들을 피해 등교 시간보다 최소 40분씩 먼저 집을 나섰다. 허름한 집에서 나오다가 골목에서 친구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집이 망한 것이 들통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난 후에는 곧장 학원에 가는 척을 하며 집 주위를 뱅뱅 돌다가 골목에 사람이 없을 때 몰래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내 집을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출입해야 하는 심정이 오죽했으랴.


어느덧 시간이 흘러 동생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게 되었다. 고등학교 배정을 위해서는 등본을 제출해야 했는데 이게 또 문제였다. 당시 등본에 적힌 주소는 동생의 친구들이 알고 있는 우리 옛집 주소와 달랐고 혹시라도 이 주소가 드러날까 봐 동생은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동생은 반장이었고, 직접 아이들의 등본을 취합하는 권한이 있다 보니 바뀐 주소는 들통나지 않았다. 이제야 한숨 돌렸다며 애잔하게 웃던 동생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예술은 고통에서 승화한다더니, 집이 주저앉고 나서 동생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연찮게 학교 시화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던 것이 계기였는데, 내 눈에 동생의 재능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동생에게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유했고 이때부터 동생은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동생은 본인의 1 지망 대학의 문예창작과에도 합격했을 정도로 10대 시절을 오로지 시 쓰는 것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 사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총천연색의 불행을 겪으며 우울에 생사를 오가기도 했다.


우리 남매는 우울해도 우울을 맘껏 누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 늘 먹고살 궁리를 동시에 해야 다. 제 아무리 시를 잘 쓴들 유명인이 되지 않는 이상 시인이라는 직업으로 먹고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동생은 펜을 놓고, 회칼을 쥐었다. 당시 동생의 전 남자친구네 가족이 강원도에서 유명한 횟집을 했는데 여름에 가게 일손이 모자라다 보니 카운터에서 계산이나 할 겸 그 가게에 발을 디딘 게 시작이었다. 전 남자 친구의 엄마는 생선을 다루는 것과 요리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던 양반이었는데, 동생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저 기술이 있으면 앞으로 먹고살 걱정은 안 하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도, 강아지도, 남자친구도 모두 서울에 남겨 두고, 동생은 혈혈단신 강원도로 내려갔다. 하루에 수천 마리가 넘는 생선의 대가리를 치고, 살을 뜨면서 수도 없이 찔리고 피를 흘렸. 그러나 눈하나 깜짝할 여유는 없었다. 죽기 살기였으니까. 손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건 말건, 온몸이 생선 비린내와 땀으로 범벅이 되건 말건 동생의 눈은 오로지 회칼 끝에 있었다.


그러면서 그 가게의 홀서빙 매니저까지 자처하며 식당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경험을 몸으로 부딪히며 배웠다. 고된 노동은 해본 적이 없는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한 달이나 버티겠냐는 동네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동생은 결국 전 남자 친구 엄마의 주방 파트너로까지 성장하며 원하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동생은 최종적으로 자신의 가게를 차리고 싶어 했다. 그런데 당시 동생이 일했던 가게는 동생에게 최저시급을 주면서 비수기인 겨울에는 업무 시간마저 줄이던 곳이다 보니 제 아무리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하고, 변변한 옷 하나 안 사 입어도 창업 자금을 마련하기엔 어림짝도 없었다.


부자도 곡소리를 하는 불경기에 엄마, 아빠도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졌다. 근근이 먹고사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냐만 피부에 체감이 될 정도로 경제는 더 어려워져 가고, 엄마 아빠의 나이는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은 노년기에 접어들어 우리의 상황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동생은 동생 나름대로,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 나름대로 어떻게 해야 먹고살지 골몰했다. 나 역시도 홈쇼핑에서 프리랜서로 나오게 되면서 매달 롤러코스터를 타는 불규칙한 수입에 스트레스를 받아 역류성 식도염이 걸릴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가족 창업을 하면 어떨까 모두의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동생은 회를 다루는 기술이 있고, 아빠는 왕년에 사업하던 사람이고, 엄마는 집이 망하고 식당 서빙 일을 5년 넘게 했으니 창업을 하기에는 각자의 역할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래도 동생보다는 약간의 쌈짓돈이 있어서 창업 자본을 댈 수 있었고 나는 브랜딩과 홍보 기획을 할 수 있었으니 비록 소자본이지만 가족 창업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