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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던 동생이 갑자기 회칼을 들었다

내가 장장 11년을 대학 하나 졸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안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도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집이 처음 망했을 때 내 동생의 나이가 고작 열여섯. 이 불쌍한 것도 집이 망하는 바람에 미국에서 유학을 작파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부모 원망하는 소리 한 번 없이 묵묵히 한국 는 짐을 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국에 온 동생은 원래 다니던 중학교로 복학하고 싶어 했다. 동생이 원래 다니던 중학교에 돌아가려면 우리 가족의 현재 거주지가 과거와 같은 학군 안에 있어야 했는데, 그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이미 남의 손에 넘어 간지 오래였고, 수중에 있는 돈으로 같은 학군 내의 집을 고르자니 집의 상태는 암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가 살던 아파트와 멀지 않은 곳에 우리의 예산과 맞는 집이 있었다. 옛날 집에서 약 두 블록 정도 떨어진 동네의 상가주택 꼭대기집이었는데  평생 이 동네에 살면서 지나가 본 적도 없는 낯선 곳이었다.


그냥 오래된 집이면 낙후된 주거 컨디션 정도만 아쉬웠을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1층에 음식점이 두 개나 있는 허름한 상가다 보니 음식점 손님들이 술에 그득 취해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 앞에 토를 해놓는 것은 일상다반사요, 하다 하다 어느 늦은 밤 귀가하던 길에는 취객이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1층 대문에 노상방뇨를 하는 꼬라지도 피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동생의 친구들은 동생이 미국 학교에 흥미가 없어서 팔자 좋게 귀국한 줄 알았다. 당연히 우리 집 또한 과거에 살았던 아파트에 여전히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창 사춘기였던 동생이 어른도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친구들에게 당당하게 드러내기란 사실상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만해도 그때 내 처지를 비관하며 자발적으로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으니까.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이때부터 동생의 등굣길과 하굣길은 더욱 복잡해졌다. 혹여 허름한 집에서 나오다 골목에서 친구라도 마주쳐 집이 망한 것이 들킬 수도 있으니 동생은 이때부터 아이들을 피해 등교 시간보다 적어도 40분 먼저 집을 나섰다. 학교가 끝난 후에는 곧장 학원에 가는 척을 하면서 집 주위를 뱅뱅 돌다가 아무런 인적이 없을 때 몰래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내 집을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출입해야 하는 심정이 오죽했으랴.


어느덧 동생은 중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게 되었다. 고등학교 배정을 위해서는 등본을 제출해야 했는데 이게 또 문제였다. 등본 상 주소는 친구들이 아는 우리 옛날 집 주소와 다른데, 혹여라도 이 주소가 들통나면 어쩌나 동생은 가슴을 졸였다. 다행히 동생은 반장이었고, 직접 아이들의 등본을 취합하는 권한이 있다 보니 바뀐 주소는 들통나지 않았다. 이제야 한숨 돌렸다며  애잔하게 웃던 동생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술은 결국 고통에서 승화한다더니만 집이 주저앉고 나서 동생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연찮게 학교 시화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던 것이 계기였는데, 내가 볼 때 동생의 재능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동생에게 글을 한번 써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유했고 이때부터 동생은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본인의 1 지망 대학의 문예창작과에도 합격을 했을 정도로 10대 시절 전부를 오로지 시 쓰는 것에 몰두했지만 그 사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총천연색의 불행을 겪으며 이 아이도 우울에 생사를 오갔다.


그런데 우리 남매는 우울해도 우울을 그대로 누릴 여유가 늘 없었던 것이, 우울해도 먹고살 궁리를 늘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않고서야 제 아무리 시를 잘 쓴들 시인으로서 먹고사는 일은 사실 요원한 일이었다.


결국 동생은 펜을 놓고, 회칼을 쥐었다. 당시 동생의 전 남자친구네 가족이 강원도에서 유명한 횟집을 했는데 여름에 가게 일손이 모자라다 보니 카운터에서 계산이나 할 겸 횟집에 발을 디딘 게 시작이었다. 전 남자 친구의 엄마는 생선을 다루는 것과 요리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던 양반이었는데, 동생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저 기술이 있으면 적어도 앞으로 먹고살 걱정은 안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도, 강아지도, 남자친구도 모두 서울에 남겨 두고, 동생은 혈혈단신 강원도로 내려갔다. 하루에 수천 마리가 넘는 생선의 대가리를 치고, 살을 뜨면서 수 없이 찔리고 철철 피를 흘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눈하나 깜짝할 여유는 없었다. 죽기 살기였으니까. 손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건 말건, 온몸이 생선 비린내와 땀으로 범벅이 되건 말건 동생의 눈은 오로지 회칼 끝에 있었다.


그러면서 그 가게의 홀서빙 매니저까지 자처하며 식당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경험을 몸으로 부딪히며 배웠다. 고된 노동은 해본 적이 없는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한 달이나 버티겠냐는 동네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동생은 결국 전 남자 친구 엄마의 주방 파트너로까지 성장하며 결국 원하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동생이 생선을 다루는 기술과 음식 비법을 체득하는 동안, 엄마와 아빠는 먹고사는 것이 암담해졌다. 남의 집 일을 하기엔 이제 나이도 너무 많을뿐더러 역대급의 불황에 도저히 먹고살 길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온 가족의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 모여서 가게를 차려보자"


시를 쓰던 요리사 동생, 쫄딱 망했지만 한 때 잘 나가던 사장님 아빠, 망하고 식당 서빙 5년 경력에 빛나는 엄마까지. 그토록 서로를 미워하던 우리가, 결국 살아남기 위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잡기 시작했다.


다음화에서 이어집니다.


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

다음 주 수요일 05월 29일 공개.

매주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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