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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창업은 미친 짓이다

홀로 강원도에 내려가 생선 다루는 기술을 전수받은 여동생은 자신의 가게를 차리고 싶어 했다. 그런데 당시 동생이 일했던 가게는 동생에게 최저시급을 주면서 비수기인 겨울에는 업무 시간마저 줄이던 곳이다 보니, 제 아무리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하고 변변한 옷 하나 안 사 입어도 창업 자금을 마련하기엔 어림짝도 없었다.


부자도 곡소리를 하는 불경기에 환갑이 넘은 엄마, 아빠도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졌다. 근근이 먹고사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냐만 피부로 체감이 될 정도로 경제는 더 어려워져만 가고, 엄마 아빠의 나이는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은 노년기에 접어들어 우리의 상황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동생은 동생 나름대로,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 나름대로 어떻게 해야 굶지 않고 집세 밀리지 않고 살지 골몰했다. 나 역시도 홈쇼핑에서 프리랜서로 나오게 되면서 매달 롤러코스터를 타는 불규칙한 수입에 스트레스를 받아 역류성 식도염이 걸릴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가족 창업을 하면 어떨까 모두의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동생은 회를 다루는 기술이 있고, 아빠는 왕년에 사업하던 사람이고, 가련한 우리 엄마는 집이 망하고 식당 서빙 일을 5년 넘게 했으니 창업을 하기에는 각자의 역할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래도 동생보다는 약간의 쌈짓돈이 있어서 창업 자본을 댈 수 있었고 나는 브랜딩과 홍보 기획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빠를 10년 넘게 안 보고 살아온 동생이 갑자기 그 인간과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일까지 할 수 있냐는 것이다. 나와 동생은 아빠가 여자랑 두 번이나 바람 거지 같은 경험을 하고 나서 그간 아빠를 정말 단 한 번도 안 보고 살았으니까.


그럼에도 우린 네 식구는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애비를 쫓아내려면 보증금이라도 쥐여 줘야 하는데 우리 수중에 그럴 돈은 때려죽여도 없었다. 애비의 행보 또한 여느 불륜 남편들과는 달랐다. 우리가 그렇게 비난하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대도 상간녀와 살림 차려 나가지도 않고 쥐 죽은 듯 우리에게 붙어있었다.


그래서 채택한 방식이 숨바꼭질형 주거였다. 한 집에 살되 아빠와 우리 남매는 서로 인기척이 나면 공동 공간에 나오지 않고 서로 숨바꼭질하며 사는 방식이랄까. 엄마는 이런 두 그룹의 중재자이자 메신저로서 중간에서 양쪽의 의사를 전달하고 이쪽저쪽 눈치 살피랴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건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이룬 가정이었을 텐데 하도 기가 차는 일을 많이 겪고 살다 보니 세상 참 이상하고 웃픈 가족 주거 형태가 되어버렸다. 아마 오은영 선생님도 이런 가족은 못 봤을 것 같다.


이쯤 되면 돈도 다 날리고 바람까지 피워댄 아빠를 굳이 숨바꼭질하면서까지 같이 살아야 했느냐, 혹은 왜 그 난리통을 겪고도 어머니는 이혼하지 않았냐 라는 질문이 스멀스멀 올라올 타이밍이다.


이유는 하나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애비라도 벌어야 애들 대학 공부도 마치고 배 안 굶을 수 있으니까. 엄마는 그것 하나만 생각하며 꾹 참고 살았다. 우리가 망했을 때 엄마 나이가 갓 쉰이 되었을 때였는데 평생 주부로 산 엄마가 쉰이 넘는 나이에 애들 둘을 대학 공부 시키고 먹여 살리는 것은 대충 생각해 봐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를 버리지 않았다. 엄마 본인의 감정을 내세우기보다 새끼들 먹이고 가르치는 게 더 절실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은, 철딱서니 없는 이 애비도 자식 건사하는 일에는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집이 망하고 나서도 온갖 3D 업종 가리지 않고 일해서 내 대학 뒷바라지까지 책임져 주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같았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아빠와 동생은 함께 일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사는 일이란, 정말 이토록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천륜이란 한 번 엮였다 하면 이렇게 환멸 나게 질긴 것이다.


동생, 엄마, 아빠 이 세 사람은 강원도로 내려갔다. 나는 방송일을 해야 하니 서울에 홀로 남았다.


백종원 대표가 들으면 아마 콧방귀를 뀔 정도의 너무나 작고 소중한 금액의 창업 비용으로 가게를 차렸다. 여동생은 사장인 동시에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엄마는 주방에서 동생의 보조 겸 요리를 하고 홀써빙은 아빠가 맡는 것으로 업무 분장이 나눠졌다. 세 사람 모두가 한 공간에서 먹고살고 일하다 보니 수익 배분 같은 것은 없이 함께 공생하는 경제 공동체가 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한 가족이 너무나 아름답게 서로의 역할을 나누고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같이 보이겠지만, 현실은


한때 잘 나가던 왕년의 사장 VS 새로 등극한 MZ 사장의 사사건건 왈가왈부 파티였다. 서로 한치도 안 져주는 부녀의 줄다리기에 중간에서 엄마는 얘 눈치 보랴 쟤 달래랴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가족끼리 합심하여 창업하면 서로 의지도 되고 인건비도 아낄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선망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으시겠지만 각오는 하셔야 한다. 그리고 이 말을 기억하셔라.


사사건건 왈가왈부.

네가 맞니 내가 맞니 툭하면 옥신각신 하던 시기를 지나 가게는 무사히 오픈할 수 있었다.


오픈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도 처음으로 가게에 방문했. 


동생이 그 개고생을 하고 어린 나이에 사장님이 된 것은 너무 감격스러웠지만, 환갑이 넘은 엄마가 여전히 주방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10년간 얼굴 안 본 이 대단한 아버님을 나도 실제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약간 심장이 떨리고 소름이 돋는 것처럼 거부반응이 느껴졌지만 24시간 종일 함께 있는 동생을 생각하면 단 며칠 얼굴 보는 일이 뭐 어려운 것이냐 싶었다.


가게 문을 들어서자마자  어떤 백발의 할아버지가 보인다. 노안이 심하게 왔는지 핸드폰을 눈알 3cm 앞까지 가져다 뭔가 보고 있는 데 이 얼굴, 어딘가 익숙하다. 근데 또 너무 낯설다.


애비였다.


내 기억 속 애비는 사람들이 실제 나이를 맞추지 못할 정도의 극강 동안에 옷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입는 아저씨였는데 어느덧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나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을 만큼 너무나 증오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대상이 하루아침에 노인이 된 모습을 보니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카운터를 지나가는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다음화에서 이어집니다.


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

다음 주 수요일 06월 05일 공개.

매주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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