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절연한 아버지를 10년 만에 만났다

"난 저 인간 뒤지면 장례식도 안 갈 거야"


잔뜩 악에 받친 나는 입버릇처럼 이런 소릴 했다. 아버지란 게 그런 존재였다. 사업을 말아먹고 가족들을 개고생 시킨 사람, 일생 동안 세 번의 불륜을 저지르며 온 가족을 환멸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린 사람. 대학 병원 정신 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내가 가장 죽이고 싶었던 대상은 나 자신, 그리고 애비였다. 내 손으로 애비의 목을 따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에 몸서리치면서도 그를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것 외에는 어떤 응징도 할 수 없었다. 엄마 말처럼 어찌 되었건 그 인간이 벌어야 온 가족 굶지 않고 나랑 내 동생이 학교라도 졸업할 수 있으니까.


죄 많은 애비라 해도 10년 동안 지 새끼들 얼굴도 못 보고 사는 게 문득문득 서럽긴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애비는 엄마를 붙잡고 새끼들 보고 싶다고 오열했다.


"진작에 잘하지 이 미친 인간아"


엄마는 냅다 욕을 후려갈기면서도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의 초라한 중년이 짠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그게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복수라고 하기에 정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나였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결국 나를 향한 가차 없는 난도질이었다.


그저 죽일 놈이었던 아비를 달리 보게 된 것은 누군가가 내게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였다.


"야 네 아빠가 진짜 나쁜 놈이면 진작에 그년이랑 살림 차리고 나갔지, 자식새끼들이 얼굴도 안 보여주는 집구석에서 투잡 쓰리잡 하면서 니들 먹이고 가르쳤겠냐?"


맞는 말이었다. 세기의 사랑을 하느라 마누라랑 자식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상간녀의 품으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 수순일법도 한데, 애비는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붙어살았다. 죄진 놈이니 죗값은 돈으로라도 치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직업에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벌어 결국 날 대학 졸업까지 시켰으니 초인적인 힘으로 기적을 만든 것도 그였다.


그럼에도, 절대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상간녀의 가게에서 마지막으로 본 애비의 모습은 눈빛에 살기가 번들거리는 악마의 형상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가족들이 같이 장사를 하게 된 이상, 어차피 한 번쯤은 그 얼굴을 볼 일이 생길 거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은 가게를 오픈했고 나도 오픈 축하를 하러 강원도에 내려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엄마를 찾으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어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카운터 앞을 얼쩡거렸다. 돋보기안경을 끼고도 도통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핸드폰 액정을 코 앞까지 두고 뚫어져라 보던 그 노인.


아빠였다.


살면서 내가 아빠라는 사람을 그리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빤질한 동안에 어느 때고 기깔나게 옷을 빼입고 다니는 한량 그 자체였는데. 10년의 세월이 흘러 내 눈앞에 나타난 그는 세상 풍파에 웃는 것이 어색해진 노인일 뿐이었다.


"어 왔니?"


나를 10년 만에 본 그가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난 대꾸 없이 못 본 척 그를 지났다. 고개를 돌리는 척하며 쏟아질 뻔 한 눈물을 몰래 동공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엄마와 동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때가 기점이었다. 아빠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엄마와 동생도 아빠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그가 가장으로서 홀로 고군분투했던 세월을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물론 잘못도 했지만 그래도 죽어라 일해서 니들 먹여 살리고 가르쳤잖아"


엄마가 그렇게 아빠를 품지 않았다면 나도 동생도 절대 아빠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용서하자"


엄마와 동생에게 말했다. 결국 그게 우리가 더 편해지는 길이기도 했다. 살면서 돈 고생, 사람 고생, 안 해본 고생이 없지만 내가 겪은 최악의 고통은 바로 가정의 불화였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였다.


이젠 자유롭고 싶어졌다. 아빠도 동생도 다 한 번씩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들이고 나도 만성 자살사고에 시달리는 만큼 죽음이 더는 우리에게 먼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느덧 환갑이 훌쩍 넘은 아빠는 이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죽음이 느닷없이 내 삶에 치고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해서 그런지 모두가 살아있을 때 꼭 이 관계를 풀고 싶었다. 이렇게 아빠와 해묵은 감정을 풀지 못하고 누군가가 먼저 죽어버리면 일생 너무나 큰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나도 이 나이를 먹으니 아빠가 어떤 성장 배경과 심리로 그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 홀어머니 아래서 보살핌 없이 혼자 자란 아빠는 늘 허기지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 와중에 결혼을 하고 우연찮게 사업으로 돈을 만지게 되니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실수를 저질렀겠다 싶었다. 기적이었다. 어떻게든 아빠를 응징하고 싶었던 내가 그가 잘못했던 배경까지 이해하게 된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어느덧 아빠의 생일이 다가왔다. 난생처음으로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살면서 했던 실수들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 죽을 만큼 노력해 주어 고맙다는 내용을 A4 용지 네 장에 담았다. 없는 돈을 탈탈 털어 생일 밥도 사주고 동생과 돈을 모아 용돈도 전달했다.


"내가 별 볼일 없는 놈인데, 고맙다"


아빠는 고량주 몇 잔을 걸치고 용기를 내어 우리에게 고백했다. 나는 머쓱함에 애써 TV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나는 아빠와 단 둘이 있으면 어딘가로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어색하다.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상간녀와의 더러운 억이 여전히 안주거리처럼 회자되기도 한다. 아빠는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짓을 할 때가 많아서 엄마와 나는 사람은 이래서 고쳐 쓰는 게 아니라며 분개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냥 그게 우리 아빠다.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온갖 고난을 경험하게 해 준 사람이기도 하지만, 내가 불구덩이 속에서 활활 타고 있더라도 1초의 망설임 없이 불구덩이에 뛰어들 사람.  믿음이 사실 역경 속에서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더는 아빠에게는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아빠가 죄책감 없이 남은 생을 산뜻하게 살다 죽었으면 좋겠다. 아빠가 죽어도 장례식도 가지 않겠다고 하던 나는 더 이상 없다. 나는 그가 쫄딱 말아먹은 집안의 장남이기도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 가장 선두에서 그를 배웅할 상주이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