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무려 11년 만에, 미국 대학 졸업하기

서른 살, 다시 미국에 돌아왔다. 집이 망해서 다니던 미국 대학을 중퇴해야 했고, 한국에서 새롭게 입시에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급기야 네덜란드로 탈조선까지 했지만 보기 좋게 '또' 실패해서, 결국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


9년 만이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이제 더 이상 다음은 없었다. 이번에는 천지개벽이 나고 대가리가 깨져도 무조건 어떻게든 졸업해야 했다.


캠퍼스에 돌아오니 어느새 나는 만학도가 되어있었다. 많게는 나와 띠동갑인 아이들과 수업을 같이 듣는 처지가 되었다. 20대 때 나와 같이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은 이미 졸업을 하고 사회인이 되어 세상 어딘가에서 멋지게 살고 있을 나이였다.


이미 옛날옛적에 공부에 손을 놓은 내가 서른이라는 나이에 영어로 철학을 전공하는 것은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암담하고 벅찬 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미국 로스쿨에 가는 게 꿈이어서 로스쿨 지망생들이 많이 전공하는 철학으로 일부러 전과까지 한 거였는데, 사실 이 선택이 내 대학 생활을 갑절은 힘들게 만들었다.


모국어로 배워도 어려운 철학을 영어로 읽고, 이해하고, 쓰고,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내겐 마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하는 일처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철학서들은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고전 영어로 쓰여있는 경우가 많아서 해석하는데만 두 배의 시간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철학과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이라 철학 커리큘럼이 유난히 촘촘하고 어려웠는데, 내 실력으로는 현실적으로 A를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낙제를 하지 않는 게 관건이었다.


한 학기 동안 읽어야 하는 전공서를 한 줄로 쌓아 올려보면 내 앉은키 만한 방대한 양이었다. 고대 철학자들의 심오하고 난해한 사상을 이해하는 것도 벅찬데, 글과 토론을 통해 그들의 이론이 가진 한계성을 입증하는 것이 철학도의 일상이었다.


수년간 공부의 흐름이 끊겨서 철학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전부 잊어버렸지만, 기초 철학 과목부터 수강할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무조건 주어진 학기에 최대 학점을 들어야 빨리 졸업하고 돈을 아낄 수 있었기에 기초 과목이 개설된 것이 없으면 심화 과목을 먼저 듣고, 다음 학기에 기초 과목이 개강하면 그제야 기초를 배우는 맥락 없는 패턴으로 공부해야 했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학습 계획이지만, 상황을 탓할 여유가 없이 닥치는 대로 소화해야 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었으니까. 막다른 골목에 서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피토하게 공부해 봤자 나는 만년 열등생이었다. 철학과 학생들의 유려한 말발과 예리한 사고를 따라가기에는 애초에 철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부족하거니와, 언어적인 한계도 사실 굉장히 컸다. 클래스 안에서 나는 그저 한국 출신의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비단 철학과목뿐만 아니라 그냥 모든 공부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벅찼다. 그나마 나를 살린 게 바로 오피스 아워(Office hour)였다.

오피스 아워 (Office hour): 수업 외 시간에 교수 또는 조교들과 약속을 잡고 공부에 있어서 어려운 부분에 대해 상담, 상의하거나 추가적으로 지도받을 수 있는 시간.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는 교과과정을 따라가기 역부족이라 담당교수나 조교들을 통해 미진한 학습 부분을 보충하고 따로 지도받았다.  


그래놓고도 F를 맞을 뻔한 과목도 있었다. 교양 과학으로 들어야 했던 인류학이었는데, 대학 중퇴 전에 F를 맞았던 과목이라 복학 후 재수강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이 나오질 않고 또 F를 맞게 생겨서 담당 조교와 오랫동안 나머지 공부를 해서 겨우 낙제를 면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내가 우리 집이 망한 이야기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글로 쓸 정도로 용기가 생겼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집이 망한 것을 숨기기도 거짓말하기도 싫어 모두와 인연을 끊었을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집이 망했다는 것은 나의 치부 중 치부였지만 성적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고민이 되는 과목의 교수들에게는 그냥 솔직하게 내 상황을 까고 절박한 심정으로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집이 망해서 대학 중퇴자로 살 뻔했는데 돌고 돌아 겨우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 난 무조건 모든 과목을 통과해서 졸업해야 한다. 외국인이다 보니 영어로 공부하는 것도 벅찬데 우울증까지 심해서 대중 앞에서 토론하고 발표하는 게 더 힘들다. 제발 도와달라.'


이렇게 호소를 했을 때 나를 외면한 교수는 대가라고 불리는 종교철학 교수 한 명을 빼놓고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내 상황을 가여워하고,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려 애를 썼다. 어떤 교수는 학생들에게 자발적으로 추가 리포트를 써오면 가산점을 주는 아량을 베풀었고, 나는 추가 리포트를 있는 대로 써가서 부족한 점수를 매워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의 나는 우울증과 동반된 대인공포와 발표공포증이 무척 심하던 시기였는데 영어 과목과 커뮤니케이션 과목의 경우 아예 과목 자체가 전략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것에 대한 주제여서 발표를 피할 수가 없었다.


담당 교수들과 솔직하게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격려를 받기도 하고, 학업적으로 조언받은 덕분에 결국 영어 과목과 커뮤니케이션 과목에서 최종적으로 A를 받았다! 복학 후 가장 보람차고 기뻤던 순간이었다. 유학생으로 드물게 영어 과목에서 A를 받은 덕에 미국 학생들의 작문을 지도하는 학생 튜터 (Writing Tutor)로 일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미국의 교육 시스템이 정말 좋은 점 중 하나는, 나처럼 열등한 아이도 어떻게든 배우려고 노력하면 교육자와 학교가 물심양면으로 도와 학생이 낙오되지 않고 학업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고 대학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공부머리는 전혀 없는 내가 미국 학교에서 살아남은 방법은 '절실함' 그것 하나였다. 부족함을 알기에 늘 적극적으로 배우고 도움을 요청했고, 감사하게도 많은 선생님과 교수들의 도움 덕분에 어려운 고비들을 넘길 수 있었다.


사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네덜란드 생활을 접고 귀국을 했던 터라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여전히 우울증 약을 매일 퍼먹으며 병마와 싸우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가 힘들었던 이유는 정말 수업과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고립된 환경에서 나를 채찍질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공부 자체로도 버거웠기에 인간관계를 이어나갈 시간적, 정신적 여유는 없었지만 막상 고립된 상황 속에서 극한의 외로움을 견디는 것은 그동안 맛본 적이 없는 고통이었다.


수업 이외의 시간에는 말을 할 일이 전혀 없으니 생전 처음으로 '내 목소리가 어땠더라?' 궁금해지는 순간이 올 정도였다.


다행히 학교에 정신건강상담센터가 있어서 무료로 매주 카운슬러와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너무 좋은 중국계 심리상담사를 만나게 되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많이 깨닫고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그 힘든 유학 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 시기의 나는 정말 너무나 간절했고,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맹렬하게 노력했다.


그래서 결국,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예상과 달리 조기졸업까지 하게 되었다! 


어차피 최종적으로는 11년 만에 졸업한 꼴이지만,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매 학기를 거의 최대 학점을 들으며 고군분투한 덕에 예상보다 빨리 졸업할 수 있었다. 마침 준비해  유학비가 한계에 올 시점이었는데, 조기졸업을 한 덕에 또 학교를 강제로 쉬고 졸업이 유예되는 최악의 상황도 막을 수 있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미국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무려 11년의 세월이 걸렸다.


웬만한 사람이 박사 학위까지 따고도 남을 긴 시간이다. 미국, 한국, 네덜란드, 다시 미국까지 네 나라를 거치며 어떻게든 대학 공부를 하려고 했던 나의 투지도 한 몫했겠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해 준 부모와 큰외삼촌, 막내외삼촌 댁의 도움이 없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대학 내내 가고 싶었던 로스쿨은 결국 돈이 없어서 지원조차 하지 못했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인권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남들에게 소위 있어 보이고 싶은 허영이었고, 애초에 나는 공부로 승부를 볼 재능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토록 원하던 4년제 졸업장을 땄으니 취업도 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겠지 낙관하던 사이에, 일은 또 벌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 발발.


하필 전 세계가 팬데믹에 정신을 못 차리며 취업 시장이 얼어붙은 때, 한국 나이 서른두 살의 중고 신입은 그렇게 처음으로 취업 시장에 내던져졌다.


다음화에서 이어집니다.


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

다음 주 수요일 05월 15일 공개.

매주 (수) 연재


인스타그램에서도

'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을 만나보세요!

instagram.com/k_jangnam


 








이전 15화 네덜란드로 탈조선, 실패한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