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대학 신입생이 되고 맞는 첫 학기에 학사 경고라니. 공부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체감상 시험을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었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학사 경고를 받은 이유는 명확했다. 내가 받은 성적들이 죄다 C, D, F 파티였기 때문이다. 시험을 잘 봤는데 답안지를 잘못 냈거나 점수가 잘못 기록되는 해프닝은 그저 희망사항이었고, 내가 시험을 못 본 게 원인이었다. 왕년에 미국에서 장학생이던 내가 학사 경고라니. 어쩌면 인생 무엇하나 쉽게 흘러가는 것이 없는 걸까.
학사 경고의 원인은 하나였다. 네덜란드의 교육 시스템이 나와 상극이었다. 미국의 경우는 시험에서 자신의 생각을 구술하는 영역이 태반이라 원래 글 쓰는 것에 자신 있던 내겐 유리했는데, 네덜란드에서 내가 마주한 시험들은 한국처럼 죄다 사지선다형이 많았다. 물론 에세이를 써야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체감상 그 비중이 미국에 비해서 현저히 적었다. 나는 기본적으로사지선다형 시험에 취약체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사지선다형으로 시험이 나오면 이상하게 실력 발휘를 못하는데,같은 내용을 글로 풀어야 하는 시험에서는 웬만해서는좋은 결과를 얻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내내 영어 과목에서 A를 받던 학생이었건만 네덜란드에서는 영어 과목에서 C-인가 D를 받고 말았으니 이 또한 환장할 노릇이었다. 시험을 응시하는 사람도 같고, 실력도 과거보다 크게 차이 나지 않는데 몸 담고 있는 교육 시스템이 바뀌니 A를 받던 애가 C- 수준까지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에세이를 제출하면 대부분 교수들이 큰 그림을 보고 평가를 하고 점수를 매기는데, 네덜란드의 경우는 폰트 사이즈, 줄 간격까지 아주 면밀하게 체크를 해서 감점을 해대니 교수 본인이 아니고서는 A 맞는 애가 있을까 싶었다.
태생이 수포자인 나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비교적 수학이 쉽다 하는 미국에서도 수학 때문에 애를 먹는 특이한 유학생이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아무리 공부를 해도 교양 수학을 C+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네덜란드에서도 수학 때문에 골탕 먹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네덜란드에서 다니던 학과가 국제관계기구학이라 1학년 때 필수적으로 미시경제학을 들어야 했는데 경제 이론도 이해가 가지 않을뿐더러 경제 과목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계산을 하기에도 벅찼다.
어찌 됐건 첫 시험에 학사경고라니. 앞으로 더 잘하자는 각오로 카운슬러의 오피스를 나왔지만 앞날이 암담했다. 학사경고를 두 번 이상 맞으면 학교에서 쫓겨날 판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판 낯선 나라에 사는 것이 무리였는지 이때부터 나의 우울증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네덜란드 현지에서도 병원을 다니며 약을 처방받고 주기적으로 의사와 상담을 했지만 특별히 차도가 없었다.
우울증이 심한 사람들은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는 말을 그때 체감했다. 자고 일어나면 마치 사방에서 내 손발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닌데 정말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잠에 들었다 깨고 일어나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버겁기 짝이 없었다. 이런 내가 혼자 밥을 해 먹고, 공부를 하고, 인간관계를 하며 보통 사람처럼 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의 정신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자 한국에 있던 여동생이 나를 보러 네덜란드에 왔고 엄마에게 나의 상황을 알렸다. 그 사이 나는 학사경고를 한 번 더 맞기 직전이라 정신이 온전한들 유학 생활을 이어갈 수도 없을 판이었다.
네덜란드 안에서 다른 대학으로 편입도 되지 않으니 학교를 옮길 수도, 그렇다고 또 새로운 학교에 지원할 수도 없었다. 사실 이때 가장 합리적인 대안은 이미 학점을 거진 채워 놓은 미국의 모교로 복학하는 것이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돈이 문제였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영원히 대학 중퇴자로 살기 일보직전이었다. 미국에서 다니던 대학은 돈 없어서 중퇴했지, 한국에서는 받아주는 대학이 없지, 네덜란드에서는 학사경고 맞고 쫓겨날 판이지. 무엇보다 우울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요, 매일 살 궁리를 하면서도 또 그만큼 죽을 궁리로 하루를 보냈다.
사실 대학 졸업이 문제가 아니라 치료와 요양이 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게 있어 대학 문제는 나의 생존만큼 중요한 문제여서 대학 졸업과 관련해서 대책이 세워지지 않는 한 무슨 치료를 받아도 고민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참 사람이 죽어라 죽어라 해도 또 살길이 있더라. 어린것이없는 형편에 대학 하나 졸업하겠다고 미국, 한국, 네덜란드까지 가고도 결국 또 졸업이 좌초될 위기가 오자 온 가족들이 발 벗고나섰다.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서 졸업을 해라"
미국으로 돌아가서 남은 학점을 채우고 졸업하는 것이 차라리 내가 졸업장을 딸 수 있는 빠른 길이라는 생각에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외갓집 식구들이 지원사격을 약속했다. 큰 외삼촌 댁, 막내 외삼촌 댁에서 내가 졸업에 필요한 비용을 그냥 도와주시기도 하셨고, 일부는 융통해 주셔서 급한 불을 꺼주시기도 했다. 이 시기 우리 가족의 경제 상황도 이전의 최악이던 시절보다는 조금 나아졌는데 엄마 아빠는 번 돈을 내게 올인하다 시피해서 어떻게든 유학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하였다.
서른 살. 그렇게 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미국으로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