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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망했으니 대학도 때려치워야 할까

우리 집이 풍비박산 난 것은 내가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불과 3달 정도 남겨뒀을 때였다. 지금 돌아보면 고3 중반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는데, 부모는 어떻게든 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내게 아빠 사업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몰락한 집안 상황에 대해 제대로 듣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겨우 한 달 남겨두었을 때였다. 


"어차피 망할 거면 차라리 애들 교육이나 끝나고 망했으면 좋았을 텐데"


첫째가 예비 대학생, 둘째가 중학생. 뒷바라지할 날이 구만리인 와중에 집이 망해버리니 엄마로서는 눈앞이 캄캄했다.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언제나 1순위였던 엄마에게 절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최악의 사태는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여동생은 유학을 중단하고 한국의 중학교로 복학해야 했고 나 또한 대학 진학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집이 망하니 자식들의 팔자도 순식간에 180도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 인생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마치 내 사정을 아는 듯 미국의 한 대학에서 졸업 시까지 장학금을 약속했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막내 외삼촌과 외숙모가 아무런 대가 없이 남은 유학 비용을 지원해 주셔서 간신히 대학 입학은 할 수 있었다.


어찌어찌 입학은 했지만 남은 유학비를 감당하는 일은 당시 우리 가족의 상황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미국은 법적으로 유학생이 아르바이트 조차 할 수 없게 되어있고, 불법으로 노동을 하다가 걸리면 영원히 미국에서 추방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현지에서 돈을 벌며 공부하기도 불가능했다.


돈도 돈이지만 이때가 바로 지금껏 나를 괴롭히고 있는 우울증이 최초 발병한 때였다. 기숙사 방 밖을 나가는 것도 버거운데 학과 공부를 따라가고 친구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삶을 이어가기엔 정신적으로 역부족이었다. 돈도 건강도 바닥을 친 나는 한 학기를 겨우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왔다고 속 편히 정신 건강을 도모할 상황도 아니었다. 아빠가 말아먹은 사업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돈 벌러 다니기 정신없던 세월이었다. 이 마당에 여전히 미국에서 유학을 꿈꾸는 것은 망상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대학은 어떻게든 나와야 나중에 취업이라도 할 수 있는데. 내 인생이지만 정말 답이 없는 상태였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시 가자니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지도, 수능도 쳐본 적이 없는 내가 국내 입시 경쟁을 뚫기란 현실적으로 까마득한 일이었다.


내신이나 수능이 반영되지 않으면서 꽤 괜찮은 대학을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에 연극영화과를 생각하게 되었다. 키도 큰 편이고 얼굴이나 목소리도 나쁘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승산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 끝에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그런데 막상 연기라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연극영화과의 입시경쟁률은 웬만한 학교의 타 전공과 비교해도 어마어마하게 치열했고 비주얼, 연기력, 특기, 운 네박자가 맞아떨어져야 그 좁은 합격문을 뚫을 수 있었다.


물론 연기를 배웠던 경험은 무척 즐거웠고 훗날 내가 방송일을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나 당시의 실력으로 연극영화과에 합격하는 일은 확률적으로 희박했다. 평생 공부만 했던 내가 연예 활동 경력이 있길 하나, 차은우처럼 얼굴 하나만 가지고도 프리패스인 비주얼이길하나. 몇 달 만에 연영과에 합격할 만큼 입시 연기와 특기를 갖추는 것도 그다지 가망 없는 일이었다.


연기 학원 원장님과 상담 끝에 연기가 아닌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예술경영학과를 지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예종은 예술 분야에서 인정받는 4년제 대학이면서도 국립대다 보니 학비가 저렴해 당시의 나에게는 여러모로 적합했다. 특히 예술경영학과는 입시에서 영어의 비중이 높았고, 수능 성적도 필요 없어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1차 지필고사를 대비하기 위해 한예종 예술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에게 과외를 받아가며 입시를 준비했고 내 느낌상 지필고사도 영어 시험도 잘 본 것 같았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불합격했다.


나중에 취직하고 먹고살려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대학 졸업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데 도통 학위를 딸 방법이 없었다. 남은 방법은 미국에서의 학적을 가지고 한국의 대학으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내가 가진 학점으로는 한국 대학으로 편입을 하기엔 필수학점이 모자랐다.


다시 죽어라 돈을 벌고, 엄마 아빠와 주변의 도움을 받아 몇 년 후 미국으로 복학했다. 편입에 필요한 학점을 미국에서 일부 취득하고 나머지 학점은 역으로 서울대학교로 교환학생을 와서 학점을 땄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대학을 다니니 생활비도 절감되고 동시에 돈도 벌 수 있어서 내겐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어느덧 나이를 너무 먹어 스물다섯에 군대를 갔다. 군대를 다녀오니 이미 내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해서 거의 다 사회인이 되어있었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인생을 어디에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암담했지만, 어떻게라도 4년제 졸업장은 따야 이 지각인생을 일부나마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의 간판 보다도 그저 학사 학위를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빨리 받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경쟁률이 높은 인서울 대학교는 아예 지원도 하지 않고 지방국립대에 편입 원서를 냈다. 인서울과 비교해도 네임 벨류가 떨어지지 않으면서 편입 경쟁률은 인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고, 국립대 특성상 학비가 저렴하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유학 경험으로 쌓은 영어 실력을 유리하게 발휘하기 위해 학과도 일부러 적성과 무관한 영문학과로 지원했다. 2차 전형인 편입 영어 시험을 치르러 지원한 대학에 직접 가서 지필고사를 보고 구술면접도 보았다. 영어 시험의 내용도 평이했고 국립대 교수들과의 영어 면접도 막힘이 없었다. 면접 때 한 원로 교수로부터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 왜 이런 지방에 있는 대학에 지원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집이 망해서 한국에서 어떻게든 빨리 학위를 따서 취업해야 한다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 대답이 틀려 먹은 것이었는지,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 것인지 나는 편입 지원을 했던 모든 대학에 전부 불합격하였다. 경쟁률도 낮았고, 시험 성적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운명은 내게 집도 망한 김에 그냥 대학도 때려치워버리라고 소리치는데 나만 눈치 없이 대학 문턱에서 질척거리나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나를 받아주는 대학도 없고, 미국에 돌아갈 여건은 되지 않고, 그렇다고 대학 중퇴자로 살 수는 없는 현실. 인간은 이럴 때 포기라는 것을 하면 가장 편하다. 그러나 대학을 중퇴하고 평생 헛헛하게 살아온 엄마의 인생을 절대로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나라도 어떻게든 대학을 나와야 하나 뿐인 동생에게도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도, 한국도 나를 원하는 곳이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탈조선이었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도 근근이 사는 판에 애초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해외에 이주해서 대학부터 다시 다니고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때부터 거의 전 세계 웬만한 국가의 대학들과 이민 시스템에 대해 이 잡듯이 찾아보았다. 심정상 학창 시절을 보낸 미국으로 떠나는 게 제일 위험부담이 적겠지만 이 나라는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이민자를 거의 받지도 않고 의외로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복지가 제공되는 나라가 아니다 보니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복지 정책이 비교적 잘 갖추어진 유럽으로 떠나는 것도 많이 고민하고 찾아봤다. 하지만 연고도 없이 무작정 유럽으로 떠나기에는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제약이 컸다. 해당국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애초에 대학을 다닐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동안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무작정 떠날 일이 아니었다.  


해당 국가의 언어를 새로 배울 필요가 없이 영어 구사력만으로 현지 생활, 학업, 취업, 정착이 가능하며 복지 제도가 비교적 잘 갖춰져 있는 국가, 세상에 그런 나라가 있을까?


있었다! 바로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경우 자국어가 존재하지만 국민의 90% 이상이 영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영어만 구사할 줄 알아도 현지에서 생활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나라에는 세계 대학 순위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명문 대학이 많아서 교육의 질이 우수하고, 학사 과정 전체를 영어로만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갖추고 있어서 네덜란드어를 구사하지 못해도 학사 학위 취득이 가능하다. 


학사 과정도 3년이기 때문에 1년의 시간과 비용을 단축하고도 학위 취득이 가능한 것도 내게는 유리한 점이었다. 유학생은 현지에서 경제활동을 아예 금지하는 미국과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유학생도 일을 할 수 있어서 돈을 벌며 공부할 수도 있다. 졸업 후에는 현지에서 취업도 가능하고, 일정 요건을 갖추고 나면 네덜란드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후 정착도 가능하다.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나는 무조건 떠나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사람 구실하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 마지막 기회였다. 초기 유학 비용을 준비해야 하는 것 빼고 이 선택을 가로막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지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설렘도 없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내게 남은 것은 오로지 선택과 직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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