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목을 맸어"
수화기 너머 엄마가 흐느꼈다. '목을 맸어'라는 그 말이 뇌리에 꽂히자마자 벼랑에서 수직 낙하 하는 듯한 철렁함에 악소리도 나지 않았다. 인명은 재천이라더니 천만다행으로 아빠는 엄마 덕에 목숨을 건져 무사했다.
아빠의 자살시도는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목을 매는 것으로 숨이 끊어지지 않자 아빠는 엄마의 감시를 피해 차 안에서 홀로 번개탄을 피우기도 했다. 유명 연예인들이 번개탄을 피워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가 유독 많이 보도되던 시절이었다.
웃을 일인지 울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번개탄에 불을 붙일 줄 몰라서 말짱히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이 아저씨는 어수룩해서 사업은 말아먹었지만, 또 어수룩해서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 시기에 나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빠의 사업이 조금 어려워졌다는 얘기만 건너 들었지 집이 망해서 엄마 아빠가 지하방으로 이사 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전후사정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아빠가 목을 매달았다고 하니 말 그대로 세상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불행은 늘 그렇게, 한밤 중 도둑처럼 찾아온다.
평생 일군 사업과 재산을 단숨에 말아먹고 가족들 고생시켜야 하는 가장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수 차례 자살시도를 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폐허가 되었던 그이지만 환갑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정신과 상담 한번 받아본 적 없으니 그 마음속에 무엇이 썩어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로부터 약 9년 후, 이번엔 여동생이 약을 털어 넣었다. 우울증 약과 수면제 한 달 치를 단숨에 삼켜 넘기고 홀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사이 동생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동생의 전 남자친구가 이 아이의 자취방으로 달려갔고, 동생은 응급실로 옮겨져 위세척을 두 번이나 거쳐 살아났다.
바야흐로 자살이 온 가족에게 전염병처럼 창궐했다. 가족들이 너도 나도 목숨을 끊으려 하는 난리통 속에서 나 역시 매일 죽음을 기도했다. 오늘 밤 자다가 심장마비가 오게 해 달라, 길 가다 뺑소니라도 당해서 죽게 해 달라 신에게 간청했지만 털 끝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마 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못했다. 이대로 죽기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남편과 딸내미가 서로 죽겠다고 난리 치던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 낸 엄마에게 또다시 트라우마를 얹을 수 없었다.
죽지 못한 나는 결국 대학 병원 정신 병동에 입원했다. 중증 우울이 심화되어 더 이상 사회생활을 할 수도 인간관계를 이어 갈 수도 없는 '완벽한 폐인'이 되었다. 친구들이 한창 캠퍼스에서 청춘을 꽃피우고 있을 때 나 홀로 정신 병동에 갇혀 있다는 현실을 떠올리면 그저 기가 차고 분해 견딜 수 없었다.
입원을 한들 맘 편히 요양할 팔자도 못되었다. 여동생을 빼고는 병문안을 온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호사스럽게 외로움에 취해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값비싼 입원비를 감당할 방법이 없으니 대학 병원에 있는 사회복지재단에 우리 집이 얼마나 어려운지 글로 써서 보내고 담당자를 만나 입원비 지원을 해달라 읍소까지 해야 했다.
가장 보고 싶었던 엄마는 퇴원날까지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의 자긍심이었던 아들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현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편이 집을 말아먹고 바람을 피우고, 엄마 본인이 하루아침에 식당 서빙 이모가 된 현실까지는 어떻게든 받아들였지만 그녀 삶에 마지막 남은 희망이자 긍지였던 장남이 정신 병자가 된 사실은 인정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엄마와 약 2년간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았다. 엄마가 왜 그때 나를 외면했는지 이해하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엄마는 엄마의 표현대로 지독한 회피형이었다. 아들이 정신 병원에 입원한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간신히 버텨온 엄마의 인생이 한꺼번에 붕괴되어 버릴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리면 남은 삶을 도저히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엄마가 무너지면 일을 할 수 없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지도, 애들을 교육시킬 수도 없으니 살기 위해 나를 외면했다고 했다.
살다 보면 생존을 위해서 이토록 지독하게 회피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이제는 그때의 엄마를 이해한다. 하지만 홀로 정신 병동에 남겨졌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처절하게 외로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어느덧 나는 우울 병력 14년 차가 되었다. 아무리 몇 날 밤을 새우고 호되게 몸을 굴려도 약이 없으면 한숨도 잠에 들 수 없다. 도움이 되고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정신과 약을 먹는다. 약이라도 먹고 자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나는 굶지 않고 생존한다. 인생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데 잠조차 내 뜻대로 들 수 없다는 무력감에 때론 좌절스럽다.
한때는 가족들이 경쟁하듯 서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이젠 모두 환난의 생존자가 되어 악다구니를 쓰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여전히 의식주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살 수 없으니 이 고통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홀로 자문하게 된다. 대체 얼마나 더 이 터널 같은 시간을 걸어가야 손톱만 한 빛 한줄기라도 볼 수 있을까. 겪을 만큼 겪고 나니 이제는 인생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가도, 아직도 세상에 처음 발을 딛는 사람처럼 모든 게 낯설고 암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