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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간녀가 내게 '서방 관리' 잘하라고 했다


"엄마, 이 인간 화냥년이랑 또 바람났어"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의 낯빛은 순간 정전된 방안처럼 새카매졌다. 애비가 불철주야 일한다고 했던 갈빗집은 다름 아닌 상간녀가 새로 차린 맥줏집이었다. 두 연놈은 그 개망신을 당하고도 시간차를 두고 또 붙어먹은 것이다.


그날 밤, 엄마는 애비의 멱살을 붙들고 집 앞에 있는 이자카야로 향했다. 사실 확인도 할 겸 변명 나부랭이라도 들어볼 셈이었다. 애비는 상간녀와 처음 바람이 났을 때도 내가 공황발작으로 실려갈 때까지 일주일을 잡아떼며 골탕 먹였으이번에도 안심은 금물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  번째 바람을 증명할 수많은 자료들을 프린트해서 한 손에 쥐여보냈다.


"이 미친 개새끼야"


엄마는 500ml 맥주잔 가득한 얼음물을 애비의 얼굴에 끼얹었다. 애비는 감을 잡고는 입을 꾹 다문  가만있었다.  번째라 그런지 이번에는 차마 아니라고 잡아떼지도 않았다. 이자카야를 나온 엄마는 그 밤 동네가 떠나가라 애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길바닥 위에서 미친 여자처럼 발광했다.


그때가 인적이 거의 없는 새벽 두 시쯤이었는데, 마침 길을 지나던 어떤 부부가 엄마를 보고  "아이고 아주머니, 애들 보고 참으세요"라고 하고 갔을 정도로 엄마는 분노에 몸서리쳤다.


부부싸움을 하다 칼부림이 났다는 뉴스가 더는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모는 매일 밤 동이 틀 때까지 격렬히 싸워댔고, 나와 동생은 저러다 진짜 사고라도 날까 가슴을 졸였다.


불륜 사실이 확인되었으니 엄마는 이제 상간녀의 맥줏집에 가서 직접 불륜남녀와 담판을 벌이겠다고 했다.

그런데 당돌하게도, 상간녀는 엄마에게 만남의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아들인 나를 데리고 오지 말 것.

둘째, 본인의 친한 친구를 동석하게 할 것.


첫 번째 불륜 때 나에게 당했던 충격이 컸는지 상간녀는 두 번째 바람이 들통난 마당에도 어떻게든 나를 피하려 수작을 피웠다. 엄마가 조건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상간녀는 또 예전처럼 줄행랑을 칠 것이 뻔하기에 엄마는 상간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엄마, 애비, 상간녀, 상간녀의 친구 네 명이 모였다. 졸렬하게도 1:3인 싸움이었다. 쪽수부터 우위에 있던 상간녀는 그제야 엄마에게 하고 싶던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서방 관리나 잘해"


첫 번째 불륜이 들통났을 때는 눈물쇼를 하며 가련한 척을 했지만 이제는 아군을 두 명이나 확보하니 숨겨둔 본색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때 마침 엄마에게 전화를 건 나는 상간녀의 망언을 듣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당장 집을 뛰쳐나와 1시간 20분이나 떨어진 상간녀의 맥줏집으로 달려갔다.


불 꺼진 맥줏집에 내가 등장하니 상간남녀와 그의 친구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 그 자체였다. 불륜남녀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어린 악마가 테이블로 향했다.  


"야 이 XX년아, 너는 서방관리 잘해서 니 남편한테 이혼당했냐?"


내가 쌍욕을 퍼부으며 발광하니 모두가 아연실색이었다. 상간녀의 얼굴에 육두문자를 뱉어주고 애비를 '너'라고 지칭하며 도매급으로 비난하니 애비는 순간 발끈해서 자리를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뭐? 너?!"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들이닥쳐서 두 눈을 부라리는 애비의 온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 싶은 극한의 공포가 순간 나를 덮쳤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공포가 들켜선 안 됐다. 나는 엄마를 지켜야 했으니까. 


"어 그래? 어디 한번 쳐봐! 죽여, 차라리 죽여봐 죽여!"


살기에 살기로 맞서야 살아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내 나이 고작 스물셋. 나 스스로 악마가 되지 않으면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지킬 수 없었다. 나는 이성의 끈을 던져버리고 뒤이어 상간녀에게 악다구니를 썼다.


"야 이 XX년아, 너도 딸 키우는 년이 화냥짓을 해놓고 서방관리를 잘하라고? XX년아 너 나중에 니 딸이 결혼하고 남편이 바람나면 똑같이 서방관리 잘하라고 할래? 너도 한번 앞으로 잘 살아봐 그 죗값 톡톡히 치를 날이 분명히 올 테니까"


어린것에게 쌍욕과 저주를 들은 상간녀는 엄마에게 서방관리 드립을 하던 기세는 어디 가고 그제야 고개를 떨궜다.


"그 죗값, 제가 받겠죠"


그 한마디를 내뱉고 상간녀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짜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실신쇼를 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알 필요조차 없었다. 상간녀의 친구가 상간녀의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라고 호들갑을 떨 때 차마 상간녀를 붙잡아 보지도, 모른 척하지도 못하던 애비는 본인이 가장 합리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가자"

나는 엄마를 데리고 맥줏집 문을 나섰다. 정황상 애비도 엄마와 나를 따라올 수밖에 없었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미련 넘치는 표정이었다.


맥줏집을 나와 택시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구급차가 왔다.

그때였다. 애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본능적으로 상간녀의 가게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 미친놈아! 어딜 가! 니가 제정신이니? 이 마당에 니 애인 디질까봐 궁금해 죽겠니?"

엄마가 치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람이 쓰러졌는데 그럼 어떻게 가만있니?"

천년의 사랑이 따로 없었다. 지 마누라와 아들이 그 끔찍한 열대야 아래 인생 최악의 순간을 견디고 있는 시점에도 애비는 쓰러진 애인이 잘못될까 봐 안달이 난 것이다.


"야 이 미친 연놈들아 니들이 언제부터 사람이었니? 너 지금 쫓아가면 오늘은 너든 나든 초상 치르는 줄만 알아"

엄마의 엄포에 애비는 그제야 무거운 발걸음을 나와 엄마 쪽으로 옮겼고 세 사람은 겨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 번의 외도, 경제적 파탄. 엄마가 이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게 없으면 본의 아니게 삶은 구차해진다.


이혼을 한들 사업 말아먹고 개털 된 남자에게 위자료로 십원 한 장을 받을 수가 있나, 평생 주부로 살았던 엄마가 애들 둘을 대학 교육 시킬 만큼 경제력이 있길 하나.


엄마는 결국 이혼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한 명이라도 더 벌어야 두 애들 대학 졸업은 시킬 수 있으니 치미는 환멸을 삼키고 악착같이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엄마는 애비에게 그동안의 죗값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애들 공부 뒷바라지 하는 걸로 갚으라고 했고 애비도 그제야 참회를 하며 돈만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와 동생은 애비와 한 집에 산다는 사실 만으로도 역겹고 분이 치밀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숨소리만 들려도 소름이 돋고 기척만 느껴져도 솟구치는 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돈이 없으니 애비를 따로 쫓아낼 수도, 내가 따로 나가 살 수도 없었다. 돈이 없으면 가족이 쉽게 찢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처럼 서로 생존을 위해 모두가 한 집에 살며 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인생 참 더럽고 치사하지.


그 당시 나의 분노와 우울은 최대치에 도달해서 수면제가 없으면 아예 잠에 들 수 없고 2시간마다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겨우 생활이 될 정도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곧 미쳐버릴 같았다. 어떻게든 내가 먼저 살아야 했기에 결단을 내리고 애비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했다.


"이 집에 살되 이 집에 없는 사람처럼 살아. 집에 오면 방에만 있고 거실이고 주방이고 다른 가족 기척이 느껴지면 절대 나오지 마. 숨소리만 들려도 소름 돋고 죽어버리고 싶으니까. 그리고 다시는, 자식들 얼굴 볼 생각 하지 마"


그때부터 네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한 집에 거주할 뿐 애비와 자식들 서로가 숨바꼭질하듯 피하고 지내는 참으로도 신박하고 서글픈 주거 형태랄까. 그때의 나는 틈만 나면 내 피의 반을 뽑아서 버려버리고 싶다고 했고, 애비가 죽어도 장례식조차 가지 않을 것이라며 치를 떨었지만 누군가를 그토록 증오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활활 태워 버리는 짓일 뿐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사람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눈앞에서 이 인간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는 사건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

다음 주 수요일 04월 10일 공개.

매주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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