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조선 자금을 모으며 네덜란드 대학교에 지원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미국, 한국, 네덜란드 포함 대학 원서만 족히 30군데는 썼을 것이다. 대학 졸업장 하나를 따기 위해서 이미 8년의 세월을 낭비하고도 다시 원서질을 해야 하는 현실이 진정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속된 말로 대가리가 깨져도 학사 학위는 무조건 따야 했다. 그래야 내가 앞으로 취업도 하고 먹고살 수 있을 테니.
네덜란드 내에서 영어로 학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대학들만 지원할 수 있었는데 마침 이 학교들은 네덜란드 내에서는 기본이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들이었다.
미국 대학을 중퇴한 이후, 지원했던 한국의 대학교들을 모두 불합격한 상태라 자신감은 바닥이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네덜란드 안에서도 명문 대학들만 지원하게 되어 불안은 날로 커져갔다. 네덜란드의 대학들도 다 나를 떨어트리면 이젠 진짜 대학 따위는 때려치우고 형편에 맞게 돈이나 벌라는 운명의 시그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람 앞날은 진짜 아무도 모른다고 나는 지원했던 네덜란드의 모든 대학에 합격했다. 불합격의 아이콘인 내가 세계에서도 손꼽는 네덜란드의 명문 대학에 전부 합격하다니. 내 길이 아니었기에 한국의 모든 대학에서 떨어지고 네덜란드로 가게 된 것인가 혼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웠던 부분은 네덜란드 대학은 편입을 받지 않아서 다시 1학년부터 신입학을 해야 했던 점이었다. 비록 중퇴를 했지만 그동안 대학을 다니며 돈과 시간을 들여 쌓아 온 학점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니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대안이 없으니 애써 만들어놓은 학적과 학점을 모두 버려야 했다.
내 나이 스물여덟, 나는 그렇게 네덜란드라는 낯선 나라에서 다시 대학교 신입생이 되었다.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서 네덜란드로 떠났고 부족한 돈은 네덜란드에서 살면서 돈을 벌어 채우자는 생각으로 떠났다. 풍차와 튤립의 나라로 떠난다는 막연한 기대 따위는 아예 없었다. 나는 오직 살아남으려고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이역만리로 떠나는 거니까.
네덜란드말로 인사하는 것조차 모른 채 무작정 떠났는데 막상 네덜란드에 도착해 보니 진짜 이 나라는 네덜란드어를 하나도 못해도 생활하고 공부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네덜란드어가 영어랑 약간 비슷한 부분이 있어 배우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릴 때부터 공교육에서 영어를 잘 가르쳐서전 국민의 영어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이것도 일부 네덜란드인의 생각이나 예시일 수도 있으니 일반화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네덜란드 본국 포함 주변 유럽 국가의 유학생들이 다수였고 나처럼 외딴 나라에서 온 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동양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인들보다 나이에 비해 동안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스물여덟에 1학년으로 다시 입학한 나를 신기해했다. 많게는 나와 띠동갑인 동기도 있었으니 나이 많은 삼촌이 MZ들 노는 사이에 어쭙잖게 끼어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네덜란드 학생 한 명과 스웨덴에서 온 학생 한 명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같이 밥도 해 먹고 가끔 맥주를 마시러 다니긴 했지만 뭐랄까 마음으로 통하는 느낌은 없었고 나는 늘 이방인이라는 느낌에 홀로 소외된 기분이었다. 미국에서도 그랬고 네덜란드에서도 그랬고 나는 참 체질적으로 외국 생활이 맞지 않는 사람이긴 했다. 타고나기를 워낙 내성적이라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데 가뜩이나 문화도 말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으려니 보통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에서 그랬듯 네덜란드에 가서도 내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도 공부를 해본 가락이 있어서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이 정도 공부하면 대충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겠다는 감이 있었다. 네덜란드에 와서도첫 번째 중간고사를 앞두고 밤을 새우며 열심히 공부했으니 최상은 아니더라도 기본은 나오겠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카운슬러가 내게 상담을 요청하였다. 카운슬러는 나를 만나자마자 대뜸이 말을 꺼냈다.
"학사 경고야"
학사... 경고? 살면서 아무리 대충 공부해도 학사 경고는 맞아본 역사가 없는데 열심히 공부를 하고도 학사경고라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뭔가 잘못된 건가? 나는 잠시 말을 잃고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