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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다영 Jul 06. 2022

어느 토요일의 기록


  아침저녁으로 챙겨야 하는 남편의 약이 얼마 남지 않아 병원에 들렀다. 토요일 오전 동네 의원에는 방문객이 꽤 많았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의 얼굴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기색이 스쳤다. 벌써 육 년째 분기에 한 번씩 만나는 얼굴이다. 남편은 심혈관 조영술을 받은 이후로 계속해서 약을 먹고 있다. 때마다 대학병원에 갈 수는 없기에 처방전이 필요할 때면 세브란스에서 연계해준 이 병원을 찾는다. 의사는 특별히 아프거나 이상한 데가 있는지 물었고 남편은 딱히 별다른 증상은 없다고 답했다. 빠르게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받아 약국으로 갔다.

  남편은 신촌에 있는 독수리 약국을 선호한다. 약을 포장한 비닐이 비교적 잘 뜯긴다는 이유에서다. 평소 약의 비닐을 뜯는 사람은 주로 나지만, 남편의 약이니 별말 없이 그가 원하는 대로 한다. 남편은 약국 한쪽에 놓여있던 무료 야쿠르트도 좋아했는데 COVID-19 이후로 서비스가 사라져 아쉬워했다. 아침 약 세 알, 저녁 약 네 알씩을 포장한 삼 개월 치의 약봉지가 든 연한 갈색 종이봉투를 들고 약국에서 나왔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아침으로 맥모닝을 먹을 계획이었지만 이미 모닝을 한참 넘긴 시각이었다. 우리는 이대에 있는 베이글 맛집으로 향했다. 나는 아메리칸 클럽을, 남편은 터키 클럽 샌드위치를 골랐고 커피를 함께 주문했다. 작은 가게 안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과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편 말로는 전에는 매장 내에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고 하는데, 가게가 협소해서인지 테이블을 없앤 모양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주문량이 꽤 많았다. 아무래도 매장 손님까지 관리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겠구나 싶었다. 우리 몫의 샌드위치와 커피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차하면 차에서 먹어야 하나 했는데 마침 근처에 공원이 보였다.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반씩 나눠 먹었다. 남편과 달리 나는 베이글처럼 질긴 식감의 빵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양상추와 토마토가 아삭하게 씹혀 먹을 만했다. 터키 클럽 샌드위치는 빵이 너무 질겨서 몇 입 먹다가 남편에게 넘겼다.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블랙커피는 세상에, 너무 맛이 없어서 둘이서 한 잔을 채 마시지 못했다. 모처럼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햇빛을 받은 늦봄의 공기가 푸근했다. 공원 옆에는 에이피엠이라는 대형 쇼핑몰 건물이 있었다. 이십 년도 전인 고등학생 때는 옷을 사러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이대에 오곤 했었다. 그때는 이대에 옷 가게나 신발 가게가 정말 많았다. 잔뜩 멋을 부린 어리고 젊은 사람들과 제 가게에 들어오라며 길 가는 사람들을 잡아끄는 이들로 골목골목이 늘 시끌벅적했었다. 면목동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옷을 사러 동대문으로 갔었다고 한다. 그 시절 동대문을 점령했던 밀리오레나 에이피엠 같은 대형 쇼핑몰이 이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대의 쇼핑 골목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낯선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에 실망한 우리는 흔하고 진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공원 건너편에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 보이기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곳이 스타벅스 코리아의 1호점이라고 한다. 1층과 2층을 오가며 우리나라의 첫 번째 스타벅스를 소개하는 사진과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했다. 커피를 마시며 뒤늦게 영수증을 확인해보니 다른 매장보다 커피값이 비쌌다.

  집에 가는 길에 연남동에 들러 산책을 했다. 이 동네를 떠난 지도 벌써 십 년이 지났다. 퇴근길마다 막걸리나 맥주를 사러 들르곤 했던 마트가 편의점으로 바뀌고, 조용했던 주택가에 카페와 술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오래된 다가구 건물이 여럿 헐리고 깨끗하고 세련된 건물들이 세워졌다. 좁았던 골목길도 반듯하게 정돈되었고 들뜬 표정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활기가 길을 가득 채웠다. 내가 살던 옥탑방이 있던 건물도 역시나 철거되었다. 적갈색 벽돌의 어두운 건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얗고 깨끗한 건물이 올라가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은 낮잠을 자고, 나는 노트북을 챙겨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카페에 앉아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두고 글쓰기를 조금 했다. 평일 퇴근 후에 두세 시간씩 글쓰기를 하다 보면 몸도 피로하고 뭔가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다. 휴일에 진득하니 써볼까 싶지만, 막상 세 시간을 넘기면 슬슬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이 잘되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연희교차로에 있는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었다. 다른 동네에 비해 다소 비싸긴 해도 일단 집에서 가깝고, 사만 원 이상 주유하면 무료로 세차를 할 수 있기에 애용한다. 내 차는 기름을 가득 넣어도 30리터가 채 안 들어간다. 기름값이 몇십 원 더 비싸다고 해도 총금액으로 따지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보다 주유하면서 세차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든다. 그래도 점점 올라가는 기름값이 무섭긴 하다.

  남편은 요즘 들어 닭고기를 정말 좋아한다. 한동안은 소고기를 그다음에는 돼지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닭고기 다음에는 어떤 고기를 좋아하게 될까. 남편 덕에 나도 덩달아 닭고기를 자주 먹고 있다. 호식이 치킨집에서 간장 맛과 매운 간장 맛을 반반씩 주문했다. 전에는 둘이서 치킨 한 마리를 다 먹지 못했는데, 언젠가부터 앉은자리에서 말끔하게 먹어 치우고 있다.

  배가 너무 불러서 산책도 할 겸 고양 스타필드에 갔다. 남편이 사고 싶어 하던 스니커즈를 신어보기 위해 매장에 들렀다. 슬립온 스타일의 신발이라 아무래도 직접 신어보고 잘 맞는 사이즈를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남편은 두 사이즈 정도를 신어본 후에 온라인 몰에서 신발을 주문했다. 그편이 몇만 원인가 저렴했다. 쇼핑몰을 둘러보다가 커피 캡슐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게 생각나 네스프레소 매장에 들러 캡슐을 몇 줄 사고, 마트가 있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특별히 살 건 없어서 가볍게 둘러보고 파인애플 하나와 도시락 반찬으로 먹을 소시지를 한 봉지 샀다. 그러다 뜬금없이 둘 다 식혜가 먹고 싶어서 편의점에 들러 식혜 한 병과 쿠키를 샀다. 아주 작은 식혜 한 병을 둘이서 나눠 마시고 집에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문득 하루를 기분 좋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충분히 잤지만, 너무 늦게 일어나지는 않았고 가뿐한 몸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해야 할 일들을 처리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고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보고 싶었던 것을 보고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남편과 사이좋게 지냈고, 몸도 마음도 무리해서 쓸 일이 없었다. 그러다 새삼 오늘 하루에 쓴 돈이 얼만지를 계산해 보았다. 병원 진료비가 5,000원, 삼 개월 분의 약이 44,600원, 베이글과 커피가 16,500원, 스타벅스 커피가 6,000원, 커핀그루나루의 디카페인 커피값 5,300원, 주유비 60,000원에 치킨 19,000원, 스니커즈 121,125원, 네스프레소 42,400원, 마트에서 14,260원, 편의점 3,300원. 그리고 쿠팡에서 주문한 섬유유연제 14,970원까지 총 352,455원이었다.

  맙소사, 그저 평범한 휴일을 조금 알차고 행복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비용은 생각보다 너무 컸다. 이런 휴일을 열 번만 보내도 내 한 달 치 급여가 사라진다. 우리는 앞으로 웬만하면 집에서 나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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