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알게 된 것들

남해 한 달 살기 2일 차

by 장유록

2020년 10월 13일 화요일

('한달살러'라는 단체에서 진행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남해에서 지낼 곳과 식비를 지원받고 남해를 흠뻑 느끼고 왔습니다. )



'나는 지금 어떤 곳에 와있고,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하루를 시작할까?'

이 질문은 언제나 아침잠보다 강하다. 어디를 여행하건 아침에 일어나 숙소 근처를 돌아보는 것은 나의 오랜 여행 루틴 중 하나이다. (다른 루틴으로는 로컬 사람들에게 맛집 물어보기, 그 지역 할아버지나 할머니분들께 동네 이야기 들어보기 등이 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엿보는 것은 내겐 여행의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남해에서 맞은 첫 아침에도 어김없이 동네를 돌아보러 나섰다. 어젯밤은 깜깜한 어둠뿐이었는데 어느새 남해는 깨어나 있었다. 건물 앞에서 부스스한 얼굴을 햇빛에 씻으며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누군가 건물에서 슬그머니 삐져나왔다. 아래 위로 체육복을 갖춰 입은 자그마한 여자였다. 어딘가 모르게 다부져 보였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뛰시려고요?"

"아, 네네."



슬렁슬렁 걸어 다니면서 동네를 돌아보려고 했었는데 얼떨결에 그 여자와 뛰기 시작했다. 건물에서 조금만 나와 오른쪽을 돌아보니 바다로 흐르는 강가에 백로처럼 보이는 흰 새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파아란 바다가 펼쳐졌다. 갑자기 풍경화가 펼쳐지고 나는 심장이 터질 듯 달리고 있었다. 기분이 순식간에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오랜 좌식생활과 집콕 생활로 인해 노후화될 대로 된 사지가 제멋대로 삐그덕거렸다. 이러다 몸이 펑! 하고 고장 날 것 같아서 속도를 점점 늦췄다.



"쉬면 안 돼요!"



..???

'대체 왜..?'



되물음이 마음속에서 메아리쳤지만 이상하게 멈추고 싶지 않아 졌다. 이 씩씩한 친구와 함께 남해 바닷가를 달리는 지금이 현실 같지 않아서 그저 좀 더 달려보아야겠다 싶었다. 어물쩍 멈추려고 했던 팔다리가 다시 어기적 어기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거친 숨소리와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귀에서 울려왔다. 그래도 이렇게 힘들어하는 나를 다독거리며 페이스를 늦춰주었던 그 친구 덕분에 결국엔 해안가를 쉬지 않고 3킬로나 뛰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체대 학생이었다...)



이렇게 달리는 동안 궁금했던 남해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전 여덟 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도 거리엔 사람 하나, 차 한 대가 없었다. 어디를 돌아보던지 사람들로, 자동차 소리로 가득한 서울의 거리는 내가 있든 없든 똑같아 보였는데 이곳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아주 크게 느껴졌다.






낮시간엔 앞으로의 식사에 관한 열띤 회의가 이어졌다.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보니 앞으론 열다섯 명이 함께 식단을 짜고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을 요량인 것 같았다. 우리는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포스트잇에 적어서 화이트보드에 붙였다. 중복된 음식을 한데 모아 다수가 원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추려보았다. 떡볶이, 카레, 제육볶음 같은 익숙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적힌 포스트잇이 눈에 띄게 많았다. 먹을 것을 정하느라 뭘 이렇게까지 체계적으로 회의를 하는지 의아했지만, 나도 모르게 식사메뉴 짜기 회의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장은 열다섯 명이 네 개 조로 나뉘어서 돌아가며 보러 나가기로 했다. 마트는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첫날부터 장보기와 식사 당번에 당첨되어 팀원들과 장을 보러 나갔다. 예산에 맞춰서 장을 보고 꽤 많은 식재료를 박스에 담아서 차에 실어오고 냉장고에 넣어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힘들 법도 한데 친구들과 펜션에 놀러 갈 때처럼 즐거웠다. 내가 지금 노동을 놀이로 바꿔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엉망진창, 우당탕탕 저녁식사를 마쳤다.








저녁엔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한 명씩 돌아가며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머지 열네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명씩 앞으로 나와 핀 조명을 맞으며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자연스럽지 않은 시간이 어색했지만, 조명 때문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이내 집중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준비한 것처럼 말을 잘했다. 진지한 마음으로 들어줄 사람만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재미있는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직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20분이라는 길다면 긴 자기소개가 끝났는데도 아쉬운 마음에 우리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넘으면 안 되는 선'과 '꿈이나 목표' 그리고 '이상형'에 관한 질문이 매번 나왔고, 답변은 늘 흥미로웠다.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다르고 '꿈'도 다르고 '이상형'도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앉아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이 선을 잘 지키고 꿈을 응원해주고 이상형을 만나길 빌어주며 잘 지내보아야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서울에서 짐을 쌀 때 남해에 가면 혼자 조용히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겠노라며 책이며 그림도구며 바리바리 챙겨 왔었다.


오늘 책 읽기는 고사하고 혼자라면 안 했을 일들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며 오랜만에 타인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즐거움과 버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인간관계가 주는 이 필연적인 감정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싶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코로나 사태로 만남이 줄고, 일까지 집에서 하다 보니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싶은 시간에 하던 꽤 괜찮아 보이는 삶을 살았는데, 어쩐지 다른 사람들이 불쑥 들어온 오늘 하루가 싫지만은 않았다.




아침부터 모세혈관이 터질 듯 시원하게 달리기도 하고, 혼자서 먹고 싶은 것을 정해 먹으면 끝나버리는 한 끼 식사가 포스트잇이 낭자한 회의와 카트 세 개가 넘치는 장보기로 변모되는 것이 즐거웠다. 한 편의 모노드라마 같은 다른 사람들의 자기소개는 최근에 본 어떤 영화나 책 보다 흥미로웠다.






혼밥, 혼술이 트렌드를 넘어 일상이 된 요즘. 도시 사람들은 타인과 함께 하는 버거움을 견딜 힘이 남아 있질 않아서 '즐거움' 마저 포기하고 자발적 고독을 선택한 걸지도 모르겠다. 당장 나부터도 퇴근 후엔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었다. 이곳 남해에선 지낼 곳과 먹을 음식, 그리고 내일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나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의 꿈과 취향을 존중할 여유가 생겼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줄어들고 함께 하는 사소한 일상이 놀이로 느껴졌다. 순간순간 짜증이 나고 혼자 있고 싶어 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분명 함께 해서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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