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이모를 찾아서

남해 한 달 살기 5일 차, 이모가 거기서 왜나와

by 장유록

대학시절을 건너온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 묻는다.



"대학 때 해보지 못해서 후회되는 일 있어?"



질문을 받아 든 이들은 눈을 굴리며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눈부셨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를 그 시절로 되돌아 간다.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는 것은 아마도 대학시절에 많은 후회를 남기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엔 무언갈 해서 후회하는 일도 있고,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도 있다.






모래알 같이 많은 후회들 중에 가장 굵직한 것을 골라보자면, 해서 후회하는 일은, 첫사랑과 헤어지고 너무 많이 운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만 울고 툭 털고 일어나도 괜찮은 일이었는데 그 당시엔 얼만큼 울어야 하는 슬픔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슬픔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만약 영화 <어바웃 타임> 속 남자 주인공처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벽장 속에서 눈을 감고 두 손을 꽉 말아쥐면 언제가 되었건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스물한 살이었던 그 뜨겁고 슬픈 여름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 눈물을 스윽 닦고, 밥을 잘 먹고, 과대표 선배님께 연락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배, 저도 농활 가고 싶어요."



...?





그렇다. 대학시절에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그 해 여름 농활, 즉 농촌활동에 가보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에서 친구들과 농사일을 거들고 '새참 먹고 해 학생들~' 하는 소리에 기뻐하며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막걸리와 김치 찢어 올린 고구마를 먹는 일. 해가 지면 평상에 모여 앉아 옥수수와 수박을 먹으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일. 청춘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 장면들이 나에겐 대학에 가면 꼭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다.










대학시절에 응하지 못했던 땅의 초대장을 그 후로 한참 시간이 지난 2020년 10월 16일, 남해로부터 받았다.





2020년 10월 16일.

남해에서 다섯 번째 날




농촌체험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남해군은 바다에 인접해 가두리양식업 등 어업을 기반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분들이 많으시지만, 고사리나 시금치 등이 맛좋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남해 곳곳에 황금빛 논도 자주 보였다. 어디선가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 같은 누런 벌판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태풍을 연거푸 세 번이나 겪으며 미처 다 자라기도 전에 누워버린 벼들이 맥없이 늘어져 있는 곳이 많아 안타까웠다.





오늘 우리는 콤바인이 수확하지 못하는 못하는 사각지대의 벼를 낫으로 손수 베어 수확할 예정이었다. 사각형 논의 네 개의 꼭짓점 부분이 바로 이 사각지대이다.








이왕 농경사회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재미로 계급도 나누었다. 제비뽑기로 양반, 환관, 장금이를 둘씩 정하고 나머지는 다 노비였다. 양반의 일은 뒷짐을 지고 돌아다니면서 때때로 촬영을 하는 것이다. 환관은 양반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보필하고 노비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노비들은... 당연히 인간 콤바인이다. 나는 장금이였다. 장금이는 분명 궁녀인데 노비보다 못했다. 노비들과 낫질을 하다가 밥때가 오면 농사일을 주신 댁에 가서 전을 부쳐야 했다. 나는 이영애인데...




사진만 연신 찍던 양반? 환관?





전을 부치러 가기 전, 태어나 처음으로 낫을 들고 벼를 베어보았다. 주황색 점프슈트를 입으신 땅주인 할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시범에 따라 머리채를 잡듯 벼 아랫부분을 움켜쥐고 낫을 당겼다. 단순한 과정의 반복이었다. 하면 할수록 리듬이 생기고 속도가 붙었다. 단순한 노동이 주는 만족감을 느꼈다. 노동의 결과를 바로 만질 수 있는 일이 주는 성취감이었다. 몇 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기획서를 쓸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즉각적인 보상이 알알이 떨어졌다.




일어나 벼들아..




한참을 그렇게 벼를 베고 있는데 저 멀리서 선글라스를 낀 할머니께서 오셨다. 기다렸던 새참 시간이구나 했는데 미닛메이드 오렌지주스를 잠깐 마시고 전을 부치러 가야겠다. 새참을 만드는 사람이 나일 줄이야. 내 로망과는 한참 다른 농촌체험이다. 그래도 막걸리는 마셔야 하니 맛있다는 막걸리를 사서 할머니 댁 주방으로 향했다.









할머니와 함께 애호박을 썰고, 부추를 다듬었다. 재료를 손질하시는 할머니 손목에 애플 워치가 있었다.




'응?'




장금이의 일




애플 워치를 차신 할머니께서는 인덕션에 전기를 올려서 부추전과 애호박전을 부치기 시작하셨다. 농촌... 할머니... 애플 워치... 인덕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서울로 갔던 아드님께서 귀촌을 선택하고 남해로 돌아와 할머니 댁 바로 앞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계셨다. 이 아드님께서는 늘 손이 바쁘시고 핸드폰을 잘 챙기지 않으시는 부모님께 애플 워치를 선물해드렸다. 아드님께서는 정말 이런 기기가 필요한 곳은 농촌이라고 하셨다. 넘어짐 감지 기능도 있고, 심박수도 측정할 수 있으니 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효심과 스마트함의 컬래버레이션이 농촌 어르신들의 삶에 편리함과 안전을 더했다.









스마트하게 전을 부치다 보니 벼베기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내부엔 전을 지지느라 기름내가 진동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이모, 아직 멀었어요?"








순간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못 들은 척했다. 음식을 하고 있는 여성이니 나를 '이모'라고 불렀을 것이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여성들을 '이모'라고 부르는 문화가 언젠가부터 자리를 잡았다. 어느 정도 친근함을 담은 뉘앙스로 자주 쓰이고 있지만 누군가는 그 호칭이 거북스러울 수도 있다. 엄연히 돈을 받으며 경제활동을 하는 직장에서 왜 낯선 이가 가족 간의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감내해야 할까. 호칭의 공백을 채울 말이 없어서 '이모'라는 단어가 그 사이를 채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참에 그 공백을 채울 다른 호칭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바닥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막걸리에 전을 먹었다. 양반이었던 사람도 환관이었던 사람도 노비였던 사람도 다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같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조선시대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백 년 전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이렇게 겸상을 할지 상상도 못 했겠지. 그 시절엔 나뉜 계급이, 그 계급에 따른 선입견이 주홍글씨처럼 평생을 따라다녔으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 속에 던져져 있다. 농활을 못해봐서 아쉬웠던 대학생 때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조선시대까지 시간여행을 다녀온 오늘. 제비뽑기처럼 자기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정해진 운명을 평생 거스를 수 없었던 시절을 살다 간 사람들을 다시 한번 애도하며,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p.s


나를 '이모'라고 불렀던 그 친구는 그 뒤로 언제나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물론 요리를 하고 있을 때도.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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