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쉬고 계신가요?

남해 한 달 살기 6일 차

by 장유록


10월 17일 토요일 남해 한 달 살기 6일 차


남해에서의 첫 주말을 맞았다. 운동회에 벼베기에 갯벌체험까지 이 모든 일이 고작 5일 안에 전부 일어났다. 저녁마다 하루에 4명씩 돌아가면서 20분간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던 자기소개 시간도 모든 순번을 다 돌았다. 한 달 살기를 하러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 달 살러' 단체 대표님과 팀장님까지 자기소개를 마쳤다.




바르셀로나에서 살다온 사람,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되돌아온 사람 등 다양한 사연을 품고 남해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이곳, 남해까지 와서 만나게 되었을까. 대부분 코로나 전염병 사태로 삶의 방향이 예상치 못하게 틀어졌고, 이왕 이렇게 어긋난 시간을 즐겁게 지내보자는 마음으로 남해를 찾은 이들이 많았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이 사람들은 다른 문이 열리기도 전에 온갖 문을 쿵쿵 두드려보고 스스로 문을 박차고 나오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아름답고 강한 사람들 같았다.



한쪽 문이 닫히면 어디든 열어버릴 사람들



남해에서의 첫 주말 오전 공식 일정은 '늦잠자기'였다. 정말 남해 살러에서 나눠준 일정 프로그램에 '늦잠자기'라고 딱 적혀있었다. 한 주간 새로운 곳에서 힘들었을 테니 휴식시간을 아예 정해주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었다. 정말 달콤한 일정이다.





예전에 나는 좀처럼 잘 쉬지 못했다. 몸은 쉬더라도 마음은 죄스러워 온전히 쉴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부지런한 엄마를 보며 자랐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노동을 시작하는 엄마의 일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주말이라고 쉬고 시험이 끝났다고 쉬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엄마는 늘 바빴다. '피곤하다'라는 말이 새어 나오면, 엄마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엄마랑 함께 여행도 다니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며 빈둥빈둥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어릴 적 내 소원이었다.






몇 년 전, 엄마가 쉬게 되셨을 때 드디어 엄마를 모시고 베트남에 다녀왔다. 내가 번 돈으로 엄마를 모시고 갔던 첫 해외여행이었고, 단둘이 떠났던 첫 여행이었다. 처음 둘이 떠나본 거라 투닥거리기도 정말 많이 투닥거렸지만, 밤마다 방에 누워 이야기도 두런두런 정말 많이 나눴다.




베트남 다낭에서 며칠을 보내고 어느 날 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가 이제 일 그만하고 쉬셨으면 좋겠다고. 우리랑 좋은 곳도 많이 다니고 이제는 즐기면서 살자고. 엄마는 잠자코 듣고 계시다 말씀하셨다. 이곳에 나와 함께 와서 정말 즐겁지만, 본인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좋으시다고. 자신이 가치 있게 쓰이고 그에 따른 보상을 얻는 것이 참 좋으시다고. 우리에게도 당당해서 좋고, 일을 해야 엄마도 안 늙는다고 걱정 말라고 하셨다.






처음엔 엄마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동안 너무 누리지 못하고 사셔서 여유가 있어도 누리질 못하시는 건지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곧 내가 내 기준대로 엄마의 인생을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지 않는다고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닐 텐데. 그러고 보면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엄마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밝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베트남 여행 이후로 엄마를 애처로워하며 내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불효라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강하고 지혜로운 나의 엄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복을 아셨고, 자신의 능력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해나가는 행복을 아셨고, 노동 사이사이에 그 누구보다 달게 쉬는 행복을 알고 계셨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며 안타까워했던 것이 나의 가장 큰 오만이었다. 나도 나만의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며 온전히 행복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엄마에게 미안해서 가지 못하던 여행도 열심히 다니고, 새로운 경험에 마음을 열었다. 쉴 때는 마음을 놓고 푹 쉬었다.






남해에서의 첫 주말. 쉬라고 멍석까지 깔아주셨지만, 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이다. 남해까지 왔는데 뭐 하나라도 더 보고, 더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렇게 쉬라고 정해놓은 날이니 쉬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른 아침 깬 잠은 쉬이 다시 오지 않았다. 늦잠을 자야 하는데!







선글라스와 모자를 챙겨 들고 얼마 전 운동회 때 눈여겨보았던 숙소 옆 풋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햇살을 쬐며 누워있기로 했다. 그곳에 인조잔디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풋살장에 들어가 인조잔디 위에 매트를 깔고 드러누웠다. '으아~' 하는 시원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해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파랬다. 남해는 하늘이 정말 예쁜 곳이다. 10월 중순인데도 봄처럼 따뜻했다.



구름 한점 없는 남해 하늘





풀밭에서 햇볕을 쬐며 쉬는 즐거움은 몇 해 전 유럽여행에서 배워왔다. 유럽 사람들은 돗자리도 없이 공원 풀밭에 드러누워있었는데, (쯔쯔가무시가 무서웠지만) 나도 그들 틈에 섞여 누워보았다. 왜 이 서양 한량들이 다 여기 누워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동양에서 온 한량도 언젠가부터는 휘황찬란한 유적지에 가지 않고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끼고 작은 담요를 하나 넣은 가방을 달랑 들고 근처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서 혼자 책을 읽다 졸다 하는 것이 유럽 생활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아주 아주 예전엔 동굴에서도 누워있고, 산속에서도 누워있었으니, 그 시절 기억이 내 몸 DNA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일까. 날씨 좋은 날,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야외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한국에선 혼자 풀밭에 누워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오래간만에 혼자 (인조지만) 풀밭에 누워있으니 참 자유롭다고 느꼈다. 방에 누워있지 않고 나오길 잘했다. 가을 햇살이 소리 없이 피부에 닿아 반짝이며 부서졌다. 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고 따뜻하고 좋았다. 마음속으로 연신 '좋다. 좋다.'를 되뇌다 이내 곯아떨어졌다.



남해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쉬어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내가 가장 편하고 기분 좋게 쉴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계속 엄마에게 미안해했더라면, 무어라도 해야 한다며 시간에 쫓기듯 살았더라면 몰랐을 여유였다. 휴식도 연습이 필요했다.






오후엔 자유 일정이라 처음으로 승마장에 가보려고 나섰다. 영국 귀족이라도 된 듯이 ‘승마장이나 가볼까.’ 하고 생각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남해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던 청년들이 남해에 오면 어떤 것들을 즐길 수 있는지 설명해주는 온라인 설명회 자리가 있었다. 그때 한분께서 남해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승마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새로운 경험이라면 항상 열려있는 나는, '남해에 가면 나도 승마를 해봐야지.' 다짐했었다.





어쩌면 승마가 남해에 오면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는데 선뜻 나서 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달게 쉬기 시작해서인지 그냥 오늘은 쉬고 싶었다. 그래도 뭐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승마장에 가는 버스를 타러 나섰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버스가 오질 않았다.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버스를 멀리 더 멀리 보내버린 걸까. (그냥 버스시간을 잘못 계산했다.) 남해를 둘러보고, 남해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것도 이번 여행의 목적이지만, 이곳에서 "살아보러" 온 것이기도 하니 오늘 하루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마치 우리가 집에서 쉬는 것처럼.





그렇게 오지 않는 버스에 감사하며 다들 어디론가 떠난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남해에서 돌아올 곳이 있었다. 숙소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집을 떠나온 곳에 또 집이 생겼다. 나중엔 이곳을 그리워하게 되겠지. 나를 품어준 나의 집이었으니까. 앞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집에 머물게 될까. 어디에 머물든 나는 내 현명한 어머니처럼 최선을 다해서 내 방식대로 행복하게 지낼 것이다. 그리고 틈틈이 달게 잘 쉬어줄 것이다.



남해에서의 첫 주말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 2020년 10월 12일 ~ 11월 11일까지 남해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온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별일 없다면 매주 토요일 업로드됩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한 날들 되시길 바랄게요.

쉬어도 괜찮으니 꼭 잘 쉬시고요 ;)


인화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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