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27일 (2010)
손, 발은 물론, 발갛게 드러난 두 뺨도, 아아 온몸이 엘 듯이 차다. 뭘 찾으러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저녁, 큰 소동에 나는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었다. 모든 것에 예민하고, 모든 것은 내게 벅찼다. 곧잘 해냈던 일들도, 내 능력 밖으로 느껴졌다. 내 뒤로, 길을 잘못 선택한 아버지의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미친 듯이 가던 길로 빠져나왔다. 도움을 받고 싶었다. 내게 다시 길을 찾아줄,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내가 다 털어내고, 나를 데려다 줄 사람이 필요했다. 있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건 그때도, 지금도. 하지만 역시 지금이나 그 때나 한결같이 믿지 못하는 게 있었다. 내게 집으로 꼭 돌아가라 신신당부한 사람이 있었지만 겉으로만 헤실헤실 웃으며 고갤 두어 번 끄덕이고 다른 길로 빠져나갔다. 믿을 수 없다. 이제 뭐가 진심이고 진실인지. 나를 대하는 태도, 내가 그를 대하는 태도나, 어떤 사물이 의미하는 바가 진짜인지. 나는 의심을 품는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모든 게 겁나고 두렵다. 나는 분명 나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보다도 역시 나는 나를 믿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것들이 거짓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아, 지금 나를 찾는 이 사람들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때 내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리는 문자나 전화가 정말 진심인지.
익숙한 듯 하지만 처음 오는 거리를 걸었다. 벌써 꽤 오랜 시간 빙빙 돌아 걸어 나온 뒤라 다리가 뻐근했다. 그래도 여름 끝자락이고 밤 중이라 그런지 날도 추웠다. 어느 주차장 앞에 앉아서 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그 밤중에 커다란 포크레인이 왔다 갔다 하면서 부산스러웠다. 안전모를 쓴 아저씨도 더러 보였다. 건너편 어디선가 비틀거리는 여자가 튀어나오더니 꼭 쓰러질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높은 하이힐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뭐라 뭐라 말을 하다 곧 끊었다. 2~3m 정도를 보는 사람이 가슴 떨리게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나는 튀어 나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집이 어디인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그런 오지랖도, 그런 친절함도, 나답게 눌러 두고 마냥 바라만 보았다. 무엇보다 도와줄 힘이 있기는 한가 싶기도 했다. 내 옆으로 한 남자가 길을 빠르게 건너가 그 여자를 부축했다. 아는 남자인가 보다 했는데 여자가 내켜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녀를 도와주겠노라는 손길을 뿌리치고 뿌리치고 그렇게 지나갔다. 얼마 안 있어서는 택시에서 세 남자가 내리더니 게 중 한 남자가 전봇대에 기대 구역질을 해대길래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다시 일어나 길을 걸었다.
전 날 오후에 있었던 무대를 담기 위해 챙겨 왔던 카메라가 생각나 이 사진 저 사진 돌려보았다. 무대를 담지 못한 게 내심 안타까웠지만 지난 일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무음으로 바꿔둔 채로 가방에 넣어둔 핸드폰은 울리는지 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MP3는 학원에서부터 내리 들어온 바람에 일찍 배터리가 나가 무거운 피엠피를 손에 들고 다녔다. 익숙한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갈까 고민을 하다, 그래도 좀 더 밝은 길로 방향을 틀어 나갔다. 큰 길가에서 다시 한번 고민을 하다, 더 오래 알아온 길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더러 차도 있고, 더러는 사람도 있었다. 평발 못지않은 발 때문에 또 오래 걷지 못하고 버스 정류장에 털썩 앉았다. 나를 본 택시가 여러 번이나 나를 보고 경적을 울려 대기 일쑤였다. 나는 그냥 스쳐지나 보내고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부재중 전화가 십여 통 있었고, 분에 찬 엄마 문자도 여러 통 있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순간에도 전화가 계속 왔다. 이제는 식구들만이 아니었다. 엄마가 여기저기 연락해보고 있구나, 알고 한숨만 내리 쉬었다. 무슨 맘인지 모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 없어졌다고 내게 연락 왔을 때, 하지만 나도 아무것도 모를 때, 그 걱정스러움과 답답함과, 이런저런. 하지만 이제 정말 모르겠다. 돌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왜, 여기까지 이렇게 나왔는지. 뭐라고 또 둘러대며 이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지에 대해.
지겹기 그지없었다. 방학 내, 자다시피 학교 일과를 보내고, 먹었다 먹었다 하고 굶으며 보내기도 일쑤였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었고, 뭐 하나 재미있는 것도 없었다. 내가 입고 있는 하얀 와이셔츠가 너무 눈부셔 보기 싫었고, 필기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낙서만 일그러진 문제집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내가 못 알아듣고 있는 것을 아는 듯이, 날 포기한 듯한 눈으로 자는 나를 마냥 두는 선생님도 더러 있었고, 이제 날 깨우는 걸 포기한 짝꿍도 있었다. 나는 하루하루 힘겹게 버텼다. 언제부터인지 알기나 할까. 그 날 이후 나는 줄곧 죽은 사람이었고, 참 한심하지만 모든 것에 흥미가 사라졌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었고, 축제를 위해 아이들을 끌고 내 팔을 불태우며 여름을 보내게 했던 수십 시간의 연습도 내겐 마지못한 것뿐이었다. 이제 미쳤는지 학교에서도 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다 일어나 담요 속에서 우는 일도 허다했고, 보는 사람 많은 곳에서 엉엉 거리기도 했었다. 이제 모든 게 지겹고 싫어져 버릴 참이었다. 내 손을 잡아주었던, 나를 부축해주었던 그 누군가도 나를 몰라주기에는 마찬가지였다. 귀찮은 것은 외면해버리기 마련이니. 비밀이었다. 직접 눈 앞에서 본 사람이 아니면, 내가 운 일, 운 이유. 이따금 우는 옆에서 정말 가슴 아프게 지켜봐 주는 아이가 있긴 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오게 되거든 굳은 얼굴을 채 풀지도 않은 채로 괜찮다 안부나 전하고 학교를 빠져나가는 게 전부였다. 가끔은 의지를 불태우며 친구들을 불러 노래방으로 오락실로 놀러 가기도 했지만, 모든 것은 가식과 연기의 결과였다. 웃으며 인사를 나눈 수많은 아이들이나, 나를 마냥 착한 아이로 알고 있는 담임이나, 모든 것은 내 바람으로부터 이루어진 내 계산과 계획의 산물이었다.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하기는 기본이고, 싫은 것도 결코 티 내지 않는다. 솔선수범하여 일의 앞에 나서고, 작은 일에도 성실히 한다. 사과할 일은 신속히 사과하고, 간식거리는 풍부하게 나눠먹고, 잔 준비물 따위도 인심 좋게 나눠 쓴다. 작은 장난이건 지나친 장난이건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참는 건 언제나 내 쪽, 말리는 것은 언제나 내 쪽, 지는 건 언제나 내 쪽. 나는 이쁨 받고 싶었다. 관심받고, 사랑받는 역할이고 싶었다. 상냥하고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고, 지나쳐 간 사람의 기억 속에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지. 연습장 그득히 소용없는 낙서로 채워 놓던 여러 날이 있었다. 정신병이라도 든 애 마냥 넋없이 지내기도 했다. 이미 착한 아이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게 된 지 오래였다. 나는 모든 면에서 빵점인 사람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랬고 오랜 시간 감추기에 급급했다. 달라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숨기기 위해서였다. 이제 지쳐버렸다. 나만이 아닐 테지만.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겠거니 해왔고, 또 그렇겠지만. 아, 괜한 투정이다 정말. 또 보고 싶어 지고야 만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구구절절 쓸데없는 소리만, 그도 아니면 경청만, 거기에 가끔 깔깔대며 웃어 대다 안녕 인사나 하고 돌아 나올 테다, 모든 것은 그대로. 얘기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근본적으로 얘기해서 달라지는 건 무얼까 싶다. 청자는 얼마나 내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주고 나를 감싸주거나 또는 일깨워주거나. 얘기해놓고 ‘괜히 얘기했다.’하는 후회나 없으면 다행이다.
또다시 갈림길. 가고자 하는 곳은 없었다. 그때그때 수많은 갈림길에서 오직 직감과 충동만으로 방향을 잡고 하염없이 걷는 게 전부였다. 대책 없고 계획 없이. 그나마 게 중에 확실한 것은 ‘하염없이 걷겠다.’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왜 이렇게 어린아이 같을까. 왜 나는 이렇게 매사에 징징대고 매달리게 되어버리고야 마는 걸까. 다시 다음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이제 핸드폰 배터리는 깜빡이고 있었다. 문자에 문자에 문자에. 내가 딱 한 사람, 답장을 보낸 사람이 있다면 동생에게 잘 있으니 잠이나 자라는 문자 하나. 새벽녘까지 잠도 못 자고 걱정하고 있는 게 미안해 보낸 문자였지만 자존심인지 뭔지 살갑게 대하진 못하겠더라. 밤공기가 점점 차가워진다. 버스 정류장 뒤 쪽으로 풀이 우거져 있었던 탓인지 자꾸만 모기가 달려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팔다리도, 가방을 메고 있는 어깨도 너무 무거웠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허리도 버쩍지근한 게 침대에 눕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버스정류장 나무 의자에 몸을 주욱 피고 누웠다. 가방을 배 위에 올려놓고 끌어안았다. 피엠피도 배터리가 다 닳아버려서 이어폰을 둘둘 감아 가방에 넣었다. 차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쌩쌩 지나쳐 갔다. 잠시 눈을 감았다. 이따금 모기 소리 같은 것에 눈을 깜빡이기도 했다. 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익숙해져 거슬리지 않을 만큼 되니, 나만의 생각에 빠져들게 되면, 그렇게 혼자가 되어버리거든 눈물이 엉엉 울었다. 내가 누워있는 버스 정류장의 지붕도, 방금 내 앞을 지나쳐 간 차도, 쓰레기통도, 왼편의 크고 작은 풀들도 파랗게. 심지어 붉은 끼가 돌다 보라색이 되어버리면 눈물은 숨이 막혀 죽어버릴 듯이 엉엉거리고 울어버리고야 만다. 손 끝부터 벽색이 차차 올라오고 있으면 난 겁에 질려 도와달랍시고 어디론가 뛰어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크고 작은 기억들이 처음엔 발 등 위로 올라오더니 이윽고 정강이를 타고 올라와 무릎으로, 손 위로 마구마구 뛰어논다. 잡으려고 애써도 얼마나 나를 놀리는지 몸이 가벼워 마구 신이 난 녀석들이 날 듯이 내 손을 피해 도망을 친다. 아직 죽지 않은 핸드폰 진동이 내 손 안에서 엉엉거리고 있었다. 진동 소리에 놀라 모든 게 도망쳐 버리고 가방을 꼭 껴안고 일어나 한참을 멀뚱멀뚱 앉았다. 미운 녀석들이 바닥에 죽은 듯이 흩어져 있었다. 분명 버리고 싶지만 할 수만 있다면 마구 짓밟아 어디 쓰레기차에라도 던져버리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왠지 모르겠다. 미련이라면 미련일 테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꾸역꾸역 삼켜 마시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한참 그곳에 더 앉아있었다. 발 언저리에서 다시 파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올 테면 벌떡 일어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몇 달 전엔가 우연히 외삼촌을 만나 먼 데 차도 안 타고 걸어간다고 꾸중 들었던 그 자리도 지나치고 몇 년 전엔가 두어 명의 아이들과 등하교하던, 여름이면 슬러시 한 컵씩 사들고 깔깔대던 길을 밟고 밟고 밟아 더 낯익은 거리에 들어서면 나는 지하 끝으로 꺼질 듯이 무너져 앉았다가 다시 일어섰다. 발목이 으스러져 녹을 것만 같이 아팠다. 차곡차곡 발걸음을 부지런히 움직여 걷노라면 다시 익숙한 곳이 나오고 더 익숙한 곳이 나와버리고 만다. 다시 벌렁 누웠다. 배 위에 까만 가방을 꼭 끌어안고. 이제 아무 생각 없었다. 그냥. 내가 처음 왜 지긋지긋한 곳을 뛰쳐나왔는지. 나오면 무언가 달라질 줄 알았던 건지. 아버지한테 무슨 소릴 지르고 뛰어나왔는지. 핸드폰, 엠피쓰리, 피엠피는 모두 배터리가 다 되어버린 채였고, 매일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도 없었다. 도대체 몇 시쯤이나 된 건지도 모른 체 나는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머리 쪽의 오르막길에서 몇몇의 사람들 올라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다시 다리를 부지런히 옮겼다. 집 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곧 집안에서 달그락거리고 출근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래 걸은 탓도 있고, 추웠던 탓도 있고, 노곤해질 대로 노곤해진 몸을 벽에 기대고 기우뚱기우뚱 졸았다. 문 앞에서 신발 신으며 인사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이모부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히고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다시 내려와 그 앞에 서성거렸다. 몇 시인지도 모르겠고, 한참 서성거리다 문을 똑똑 두드리면 듣지 못했는지 아무 소리도 없다. 다시 한번 조금 세게 똑똑똑 하면 그 새벽녘에 놀란 목소리의 막내 이모가 ‘누구세요?’한다. 나는 대꾸 없이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이모는 재차 ‘누구세요?’라고 아침잠에 잠긴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고, 나는 ‘이모’힘없이, 그리고 지쳐 울듯이 이모를 부르고 문을 열어준 이모가 내게 베개나 이것저것을 가져다주며 ‘외박했어? 술 마셨어? 집에 안 들어갔어? 잠 안 잤어? 어딨었어? 울어?’라고 나를 다독여 주었다. 나는 울고 말고 할 기운도 없이 잠들어버렸다. 잠결에 이모가 내 얼굴 앞에 다가와 잠이 든 것을 확인해 보고 엄마에게 전화하는 기척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를 깨우고 학교에 가야 하는지 몰랐다며 서둘러 나를 챙겨 콜택시에 태워 보낸다. 학교에 꼭 가라고. 집에 가서 교복 갈아입고 학교에 꼭 가거라 신신당부를 하고 나를 태워 보내면 나는 달리 말없이 그저 '이모 말이니까'라는 이유를 붙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가 주섬주섬 교복을 껴입었다. 지난밤에 얼마나 나를 찾아다녔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쁜 내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엄마에게 달리 안부 없이 학교로 갔다. 0교시는 듣는 시늉도 한 번 안 하고 깨우는지 마는지 그냥 엎어져 자버렸다. 누군가 불러 깨우는 소리에 한번 일어났다가 다시 누운다. 비아냥대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다 아는데. 그와 달리 짜증이 솟구쳐 올라왔다. 사방에서 떠들고 있는 반 아이들도 신경을 박박 긁는 듯 했다. 짝꿍이 친구가 왔다며 내게 이야기해줄 무렵에 함께 내 옆에 와서 또 한 번 뭐라 떠들어대면 나는 필기구라든가 착착 모아 가방에 넣고서는 어디가냐는 물음에 집에 갈래 한마디 하고 신발을 챙겨 교실을 나온다. 계단 내려가는 중에 간밤에 문자 보내왔던 친구 중 한명을 마주쳤지만 대꾸 없이 나와선 성큼성큼 겁도 없이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다.
현관 앞 계단 아래까지 와서 멀뚱히 문을 쳐다보았다. 차마 들어가지를 못하고 터덜터덜 대문 밖으로 나왔다. 와이셔츠는 벗어서 가방에 욱여넣고 한숨만 푹푹 내쉬면서 걸음을 옮겼다. 핸드폰은 지난밤에 배터리가 나간 후 집에 들렀을 때 충전기에 꽂아 놓은 채고, 여전히 시계도 차지 않았고 MP3나 피엠피도 방전된 상태 그대로였다. 도서관에 들어가 한 자리 차지한 뒤에 멍청하게 앉아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다이어리를 꺼내서 이것저것 낙서도 하다 또 자고 또 자고. 이제 이때까지 안 들어오면 무단결석으로 넘어간다는 정규수업이 끝날 시간도 지나쳐 버렸고 핸드폰이 없으니 누가 내게 전화를 해댔는지 문자를 보내댔는지 조차 모르겠다. 정규수업이 끝났을 그 무렵 가방을 다시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갈 심산으로 나왔는데 막상 골목까지 오니 주차하여놓은 아버지 차를 보고 한참을 서성이다가 다시 발길을 되돌리고 말았다. 집 근처 놀이터에 앉아서 꼬맹이 하나가 비비탄 총을 가지고 와서 다른 애들 괴롭히는 걸 보고 있었다. 차라리 엄마가 슈퍼에 가다 나를 보고 귀라도 잡아끌어 데려가 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아 무슨 염치일까. 이 발걸음으로 다시 한번 집에 들어갈까 싶어 일어났다. 하지만 대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나왔다. 어디 갈까 다시 고민하다가 여름 내 연습했던 체육관에 가기로 했다. 아 이제 발목도 너무 아프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체육관에 다다르기 직전 식수대에서 날 찾아 나온 언니랑 친구를 보고 후다닥 차 뒤로 숨었다.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찌그러 앉아서 한숨만 쉬었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잘. 얼굴 보기에 미안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보기 싫었다. 사실은, 무슨 소리들을 할까 잔소리 듣고 싶지도 않았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을이 오고 있어서인지 확실히 여름보다 해가 짧아진 것 같았고, 온도도 조금은 서늘해진 것 같았다. 전 날에는 축제 때문에 새벽부터 피곤하게 움직였는데 거기다 밤새 돌아다니고 이틀째 밖에서 나돌아 다녔더니 쓰러질 것 같았다. 게다가 아침에 이모집에서 계란밥 한 그릇 먹고 나온 게 전부라 허기지기까지 했다. 계단에 앉아서 사람들이 농구하는 걸 마냥 쳐다보았다. 미래가 시민회관에서 주워 왔다면서 아침에 줬던 저고리 하나가 있었는데 추워서 와이셔츠에 저고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듯싶더니 이윽고 깜깜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중전화박스로 갔다.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 몇몇에게 전화를 했는데 대부분 꺼져 있거나 받지 않았다. 게 중 한 명이 받았는데 학교 축제 중이라며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내가 지난 이틀 동안의 일을 간략적으로 얘기하면서 도와주길 바랬지만 돌아오는 말은 시끄러운 축제 소리와 ‘아그래?’란 말이 고작이었다.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으면서 어 그렇다, 그리고 축제 잘 즐기라는 인사로 전화를 마쳤다. 도로변에 앉아서 빵빵거리는 차들과 옆 사무실에서 나온 민머리 아저씨 한 분을 구경하다가 다시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그리고 정적. 나는 여보세요 조차 하지 못하고 아무 말 없다가 엄마 한마디 했다.. 그리고 민주니? 그다음엔 평소 엄마가 내게 해주었듯이 '으이고 지지배야. '였다. 딱 엄마였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밥은 먹었냐 어디냐 이것저것 묻는 엄마에게 찜질방에 가자 졸랐다. 전화를 마치고 시간에 맞춰 예술의 전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다시 체육관 쪽으로 내려갔다. 야구장 위로 올라가서 벤치에 드러누웠다. 하얀 저고리 펄럭 펄럭 걸쳐 놓고. 잠이 들 듯 말 듯. 몽롱한 시간 속에서 헤매고 헤맸다. 그 길에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좀 전에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거나 차마 걸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이유도 모르겠지만 괜히 코가 시큰해졌다. 왜, 왜 전화를 차마 걸지 못했을까. 왜 수화기를 들고, 그 사람이 생각나도, 지금 나 좀 데리러 와달라고, 왜 그 말 한마디를 할 수가 없었을까, 어째서. 모기가 기승을 부렸다. 짜증스럽게 모기를 두어 마리 때려잡고 일어나 제자리에서 동동 뛰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산책하는 행인들을 구경했다. 귀에는 주황색 귀마개를 꽁 끼워 넣은 채로. 사람이 지나가되 소리가 없으니 모두 허상일 것만 같았다. 소리 없이 내 팔에 앉았다간 모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을까. 딴딴한 농구공을 열심히 튕기고 있는 저 남자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골대에 공이 튕기는 소리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드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무언지 모르는 나는 지금 이 벤치에 앉아있다 한들 정말 앉아있다 할 수 있을까. 내 앞으로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빙글빙글 돌다가 주인 손에 이끌려 자리를 떴다. 그 아주머니, 내게 뭐라 뭐라 하던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냥 작게 예… 하고 말았다. 벤치 위로 짙게 덮인 등나무 줄기가 소름 끼치게 뻗어 내려와 나를 노려볼 테면 화들짝 놀라 나도 한참을 노려본다. 그것이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들어 목을 졸라 대면 힘없이 그저 받아들이다가도 아니 다 싶어 손톱으로라도 갉아내 보다 지쳐 다시 축 늘어지고 만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헤집어 누군가를 찾게 되면 그리고 또 무언가를 찾게 되면 눈을 번쩍 뜨고 줄기를 악 하고 물어버렸다. 그리고 내달려 엄마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내 뒤로 무언가 쫓아올세라 가는 길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뛰기만 했다. 엄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지만, 정작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집에 들러 동생까지 챙겨 찜질방으로 가는 길에 자꾸만 울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