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렛(2023)
어제의 달은 작지만 밝은 손톱달이었다. 나는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르고 하루를, 또 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모양이 바뀐 달을 보고서야 이만큼, 이마안큼 시간이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날이 추워지지 않은 어느 때에, 쓸쓸히 산책을 다녀오던 그 어느 길 위에서, 당신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궁금해서 나는 당신을 찾아야만 했다. 그 작은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나는 손가락을 꽤 여러 번 움직여야 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바닥 위에 이 한마디, 저 한마디를 흘리다가 기어코 당신에게 아주 작은 한마디를 보냈다. 진부하고도 지루한 그 한마디를 하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당신의 작은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추웠던 그 언젠가,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쳐 나를 툭 잡아채어 손을 흔들던 당신의 모습이 기억나.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조차 쓸쓸했던 발걸음에, 생기가 돋았다. 그 추운 날 허연 맨손을 흔들며 지나쳐 간 그 짧은 순간이 반가워서.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나를 알아봐 주어서. 그래서 당신의 손을 잡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춥고 쓸쓸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당신이 있었어서.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하는거야.
차갑게 식은 땅 위에 작은 눈사람을 만들면서 내 생의 마지막 눈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날에. 색을 잃고 찬 길바닥 위에 떨어져 있던 나뭇잎에 더 이상 아파하지 못하고 무심히 밟아버리던 날에. 웃는 체를 하느라 힘들었던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모인 회식자리에 뒤늦게 도착한 어떤 사람이, 밤이 깊고 깊어 해가 뜨기 직전까지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 언젠가 그 사람이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며 나를 데리고 앉아 나에 대해 물어왔다. 그 사람이 보내준 인터뷰 녹음 파일을 나는 몇번이나 돌려 들었다. 그 사람의 웃음소리가 좋아서. 그러면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덩달아 떠올라서. 웃는 체를 하지 않아도 웃음이 나서. 그 사람이 내가 여러 번 돌려 들었던 그 파일을 정리해서 쓴 글을 보고 그 사람이 나를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었는지 다시 떠올렸다. 웃는 체를 하는 나와, 그런 나를 향해 웃던 그 얼굴을 떠올리고 있자니 나의 작은 눈사람이 어서 녹고 따듯한 봄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벌겋게 식은 당신의 손이 따듯해지길 바라서.
하지만 저기요, 저는 어차피 죽을 거라서요. 저는 이 마음을 당신에게 줄 수가 없겠어요. 그것이 미안해서, 그래서 나는 당신과 나눠 먹은 초콜렛 아래에 마음을 숨겨두고 대신에 새로 사온 초콜렛을 건넨 거예요. 이윽고 이윽고 결심을 먹었던 어떤 마음이 당신에게 닿아서, 내가 나눠준 초콜렛이 당신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가서, 결국에는 그저 어떤 죽음으로 기억이 될까봐. 그래서 나는 초라하게 당신의 웃음소리를 자꾸만 들어보고는 당신 앞에서 시큰둥하게 당신을 쳐다보았던 거예요.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무심히 차버린거예요. 바스락. 바스락. 찢어지는 낙엽과, 바스락대며 포장지를 뜯어 톡 떼어낸 작은 초콜렛 조각에 내 마지막 겨울을 묻어두려고요. 이 다음 봄이 당신에게 끔찍한 봄이 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 나는 그 겨울에 묻어두었던 내 마음이 불쌍한 건지도 모르겠다. 저 아래에 텅 빈 테니스 코트를 두고 계단 위에 멍하니 앉아 시린 손을 비비고 있던 그런 날들 사이에 있었던 당신에게 나는 멋대로 의지를 해놓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당신에게 어떤 고마움을 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달이 돌고 돌고, 몇번이나 돌았을지 모를 밤에 전화를 해. 일이 끝나고 수도 없이 함께 갔던 작은 노래방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하던 너에게 섭섭함을 느끼는 내가 한심스러워서 나는 다시 저어기 아래에 마음을 숨기고 전화를 마쳤어. 그 추운 겨울의 초라한 나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이 지금의 나를 알아줄 수 있을까. 그 초라한 나만을 알고 있는 니가 싫었던 거야.
그 해의 눈사람은 기어코 녹았다.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볼품없이 작아지는 눈사람을 보면서, 그 아래에 숨겨둔 마음이 너에게 닿을까봐, 혹은 닿지 않을까봐 안달복달하며 울었던 그 나는 그 어느 순간에도 내 마음껏 당신에게 닿지 못하고 잘 지내라는 말 밖에 던지지 못했다. 이번에는 무심하게 나를 툭 치고 인사를 건넸던 당신에게 나는 끝내 먼저 인사를 건네지도 못 해보고 다시 추운 날의 아래에 당신을 숨겨 둔다. 녹아 사라진 초콜렛 대신에 달달한 초콜렛 향이 입 안에 텁텁하게 남았다. 그 텁텁함을 모른 체 하려고 다른 초콜렛 조각을 입에 넣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