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너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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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댓바람부터 만화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만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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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났는데, 문득 요즘 만화를 안 보고 있었네?라는 생각이 들어서 최신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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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일본 최신 애니메이션들을 많이 본다. 동생은 나에게 '오타쿠'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오타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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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는 오타쿠는 내 동생이다. 물론 내 동생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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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번 본 만화들은 그걸로 끝이다. 볼 때는 재밌게, 집중해서, 잘 보지만 다 보고 나서 남아 있는 건 없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보는 일이 도통 없다. 잘 기억도 못 한다. 보면서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즐거워하고, 충분히 슬퍼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인지 인생 영화, 인생 드라마, 인생 만화 같은 것도 없다. 본 것들은 내 안에서 나를 거친 뭔가가 된다. 하지만 만화가 남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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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생 ㅇㅇ에 대한 기준이 높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만, 대체로 그렇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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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동생은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본다. 대사를 외운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반복해서 계속 틀어놓는다. 좋아하는 만화를 보고 보고 또 본다. 내 생각에는 오타쿠를 고르라면 내 동생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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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러고는 맞는 것 같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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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인생에 아직 그렇게 나한테 영향을 줄 만한 영화나, 드라마, 만화 같은 것들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가끔은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자연스럽게 대사를 외우는 동생이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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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울 일인가? 근데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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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고 있는 만화도 금방 잊힐 것이다. 지금 잠깐 재밌으려고 보는 어떤 짧은 무언가일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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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보다는 내가 진짜로 만져보고 내가 진짜로 보고, 내가 진짜로 느끼는 생생한 것들이 나는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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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개구리 인형의 보들보들한 털, 내 손이 치고 있는 키보드의 타건감, 자주 쓰는 만년필 한 자루를 쥐었을 때 오는 무게감, 봄이 오면 피게 될 작은 꽃들, 나뭇가지에 돋아날 새싹의 색깔 같은 것.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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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얼른 봄이 됐으면 좋겠다. 어제는 따듯하더니 오늘은 또 조금 추워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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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보다 말고 쓰는 어떤 짧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