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이 연필은 뭐야? (2024)
내 이름 아래에 작은 연필을 하나 숨겨 두었어요. 당신이 내 이름을 들춰봤을 때, 이게 뭐지? 하고 궁금해하도록. 그래서 나한테 이 연필은 뭐야? 라고 물어보길 기다리고 있어요.
뭐긴, 연필이지.
당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겠지요. 연필이지. 맞아. 근데 그걸 왜 이름 밑에 숨겨 두었냐고. 당신은 형용하기 힘든 궁금증에 휩싸이게 될 거예요. 저는 연필을 한 번 잡아봐, 하고 당신에게 연필을 내밀어요. 당신은 여전히 알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얼떨떨하게 연필을 받아 들어요.
이거. 뭐. 어쩌라고?
그냥 잡아 봐.
당신은 작은 연필을 손에 쥐어봤다가 손바닥 위에 이리저리 굴려보아요. 연필의 끝이 뭉툭하네. 쓰던 건가? 로고가 다 닳았네. 많이 썼나 보다. 이렇게 작아질 때까지 다 쓴 건가? 칼로 깎은 자국이 있네. 연필을 칼로 깎아 쓰나. 아니, 이걸 왜 잡아 보라고 한 거지. 애당초 연필을 왜 숨겨 뒀지? 뭔가 의미가 있는 연필인가? 특별한? 당신은 연필에 있을 사연을 상상해 봐요.
그래서 왜 숨겨 뒀어?
다시 되돌아온 질문에 저는 그저 웃음을 지어요.
글쎄?
안 알려 줄 거야?
저를 물끄러미 보다 다시 연필로 시선을 옮겨요. 손 안에서 연필을 돌려 보아요. 아무렇게나 벅벅 깎아 놓은 것이나, 일부러 깎지 않아서 뭉툭한 연필의 끝, 손 떼가 묻어 얼룩진 몸통과 지워진 로고, 뒤꽁무니에 지우개가 달려 있던 흔적 같은 것. 그런 것이 당신의 손 안에서 휘휘 돌려지다가 알맞은 자리에 멈춰져요. 연필을 손에 쥔 채 다시 제 이름 밑을 뒤적거려요. 또 뭘 숨겨두진 않았나? 아무것도 없네. 이 작은 연필 하나뿐이었구나. 그리곤 다시 이름을 제자리에 두곤 내 이름을 빤히 보아요. 이 이름도 이 연필로 적었을까? 뾰족하지 않은 것이 이 연필로 적은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걸로 적은 거야?
응.
내 이름을 다시 보아요. 반듯하게 적혀 있는 세 글자. 그리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연필. 그 연필은 당신의 손에 쥐어져 있어요. 당신은 내 이름 세 글자를 한 자 한 자 곱씹으며 읽어보아요.
좋은 이름이야.
그래?
응.
그리고 세 글자 옆에 당신의 세 글자를 새겨요. 천천히, 한 자 한 자.
당신 이름도 좋아.
그래?
여섯 개의 글자가 나란히 올려졌어요. 나의 이름과 다르게 조금은 삐뚤게 올라간 세 글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와요. 뾰족하지 않으면서도 각진 모양을 가진 이름. 그러면서도 둥글고 삐뚤게 쓴 당신의 이름을 보아요.
바람이 불어와요. 당신은 연필을 이름 옆에 올려두고, 내 눈을 보면서 이야기해요. 바람이 불어와요. 이름을 쓰며 갈려 나온 흑연이 우리가 보지 못한 사이에 바람을 타고 흩날려요. 세 글자, 그리고 또 세 글자의 이름이 나와 당신의 가슴에 남아요. 바람을 맞아도 날아가지 않은 이름들이요.
나는 슬그머니 연필을 주머니에 넣어요. 이제 이름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