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민주에게
민주, 안녕. 겨울의 바람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3월이 되었어. 지난 주말은 정말 추웠어. 3월이라니! 이제 봄이다!라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풀어졌는데 여전히 춥더라구.
어느 해의 겨울도 참 이렇게 추웠던 것 같아. 언제나의 겨울이 춥긴 마찬가지였겠지만. 가장 추웠던 겨울을 생각하면 역시 난 그때가 가장 추웠던 것 같아. 언제쯤이었지. 언젠지 가물가물한데도 그때의 추위가 아직도 생각나. 여섯 번째 편지에서 얘기했던 그 겨울이야. 아침이 되면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들고 집 앞으로 나가. 뿌연 하늘 너머로 어디선가 피어오른 뿌연 연기가 흩날리고 있었고 슬리퍼를 끌고 바닥에 발을 디디면 발가락 사이로 하얀 눈이 파고 들어왔어. 담장을 따라서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고, 골목 밖으로 나가는 내리막길에는 얼음이 얼어있었어. 나는 그 얼음이 언 길을 물끄러미 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그날의 할 일들을 떠올렸지. 마지막엔 꼭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했어, 죽기 전엔 다 해 둬야지.
민주야. 그때 니가 했던 생각들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어. 다시 찾아온 우울감. 다시 찾아온 무기력감. 다시 찾아오고 만 공허함. 그런 것들 사이에서 너는 그렇게 생각했지. 이놈들이 다시 날 찾아왔네. 또. 또 찾아오고 말았네. 너는 사는 동안 그런 것들을 많이 겪어 왔어. 무기력하게 우울함을 느끼는 일, 하는 수 없이 공허함에 가둬지는 일. 너는 그런 때가 올 때마다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그때마다 죽음을 떠올렸어.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러다가 그런 때가 지나쳐 가고 다시 평화가 찾아오면 너는 그 평온을 불안해했어. 이러다가 또 사라질 거지? 이러곤 다시 나를 괴롭힐 거지? 나를 또 공허하게 만들 거지? 그해의 겨울에는 그게 너무 너무 너무 무서웠어. 끝없이 이어지는 동그라미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우울과 불안.
대학교에 다닐 때 친구 중 하나가 요즘 주변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고 다니는 게 있어, 라는 말을 시작으로 나에게도 질문을 해도 되느냐 하길래 고개를 끄덕였어. 너는 행복해? 나는 그 질문에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어. 아니, 나는 행복하지 않아. 그렇게 대답했을 때 그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던 게 생각나. 나는 조금 더 나아가서 한 마디를 덧붙였어.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친구가 잠시 나를 살피더니 내가 이 질문을 했을 때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 라고 했어. 그렇다고 하니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어. 그냥 그래? 라고 하곤 말았지. 친구도 그 이상 묻진 않더라고.
행복할 틈이 없었어. 우울해지면 우울함에 갇혀 있었고, 우울하지 않으면 불안감에 갇혀 있었어. 계속 동그라미를 돌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 가장 무서웠던 건, 훗날 다시 이런 우울함이 찾아왔을 때 또다시 나를 자책할 나. 그때 죽었더라면 오늘의 이 우울을 만나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나. 그 겨울에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던 거야. 전에 죽었더라면 오늘의 이 공허를 견디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마냥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거였던 거야. 나를 자책하는 일. 그리고 훗날의 나도 그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어. 훗날, 그해의 겨울을 생각하면서 그때 죽었더라면 이것들을 다시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다시 나에게 원망을 쏟아부을 것을 생각하면서, 그러면 지금 죽어야겠다고.
민주. 그때 죽지 않아서 고마워. 그런 시간을 겪은 널 사랑해. 그런 시간을 겪어서 지금 니가 가지게 된 마음들을 사랑해. 작은 케이크 한 조각을 기억하고, 따듯한 사람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나는 사랑을 해야지, 나는 사랑이 되어야지, 다짐하는 너를 사랑해. 민주야. 살아줘서 고마워. 첫 편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이 고마움을, 이 사랑을 점점 더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언젠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울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언젠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살아갈 거야. 언젠가 얘기한 것처럼 특별하지 않은 하루도 사랑하면서, 언젠가 얘기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하면서, 언젠가 얘기한 것처럼 사랑과 비슷한 모양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제 너에게 쓰는 편지는 그만두려고 해. 지금 시점에서 나눌 수 있는 마음들을 많이 나눠봤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들을 많이 주고받았어. 우리가 나누는 편지는 여기까지. 하지만 슬퍼하지 마. 나는 늘 네 곁에 있으니까. 내게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언제든 또 편지를 써 줘.
힘들 땐 울고, 즐거울 땐 웃어. 행복하면 방방 뛰고, 서글플 땐 다독여 줘. 그런 하루를 또 살아줘. 그리고 또 살아있음을 감사히 여겨줘. 니가 사랑하는 것들을 자꾸 되새기면서. 그렇게 살아줘.
잘 지내. 또 봐.
2024. 3. 3. (일)
민주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