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서랍에 담긴 것 (2024)
저걸 언제부터 썼더라? 침대 주변을 정리하다가 문득 옆에 놓인 작은 서랍이 보였다. 내 무릎까지 올라오는 작은 서랍으로, 3층으로 되어 있는 짙은 나무색의 서랍이다. 서울에 올라오면서 샀던가? 아니다, 대학교 다닐 때도 책상 옆에 두고 썼던 서랍이다. 그럼 대학교 갈 때 썼었나? 아니다, 아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저 서랍을 거울 아래에 두고 로션, 스킨 같은 것을 올려놓고 썼던 게 기억난다. 아마도 그때 살던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내 방이 생기고, 책상을 사면서 같이 온 서랍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렇다고 치면 벌써 10년을 훌쩍 함께 산 서랍이라는 얘기다.
이사를 할 때 안에 들어있는 잡다한 것들을 따로 빼서 짐을 싸기가 싫어서 박스 테이프로 서랍을 둘둘 감았다. 그래서 서랍 문들에 지저분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그게 보기 싫어서 서랍을 갖다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또 그냥 두고 쓰다 보니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그다음 이사를 할 때도 똑같이 그 자리에 박스 테이프를 둘둘 감아서 옮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옮겨오고 나서 저 서랍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 안에 들어있는 잡동사니를 꺼내 쓴 적도 없고, 사실 저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는 게 있다면, 묶음으로 샀던 지우개 한 줄과 4B연필 한 다스? 그런 것들을 넣어 놨던 것 같다. 음. 그 외에도 뭐가 많았는데, 뭐였지. 아무튼 저 작은 서랍은 서랍의 역할을 못한 채 몇 년을 나와 함께 했다. 지금은 침대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는 잘 때 안경을 올려두거나, 매일 먹는 약을 올려두는 용도 정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동안 서랍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채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드니 서랍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같이 떠올랐다. 뭐 하면 하는 거지, 그렇지만 왠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어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잊어버리자고 다짐할수록 더 짙고 강하게 마음을 치는 기억들이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사촌동생들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나는 엄마에게 그런 걸 물어봤다. 내 사춘기 시절은 어땠어? 엄마는 삼 남매 중에서는 내가 가장 힘들게 사춘기를 보냈다고 대답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춘기를 겪었다기보다, 그때 니가 많이 힘들었지. 상황이 그랬으니까.
음, 그렇지. 생각해 보면 그렇네, 동생들보다 내가 좀 요란 맞긴 했다.
그리곤 엄마에게 다시 물어봤다. 그때, 내가 사춘기라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치, 사춘기를 겪는 느낌은 아니었지.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어.
음. 그렇구나. 어쨌든 난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청주에 가는 게 싫어. 안 좋은 기억들이 너무 많아.
엄마는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내가 편하다는 말을 했다. 그렇지, 나도 알아. 근데 잘 안돼. 그런 얘기를 좀 더 나누다가 통화를 마쳤다.
몇 년을 방치해 둔 오래된 작은 서랍을 다시 훔쳐본다. 오래된 것 치고 아직 튼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퍽 든든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다. 정리가 될까.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것에 좀 약한데. 정리할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 내가 편하겠지. 오래된 기억들을 끌어안고 사는 것보다는. 그런데 그냥 테이프로 둘둘 말아 숨겨두고 살면 안 될까. 그 위에 안경이나 약통 따위를 올려놓고, 그냥 모른 체 잠에 들면 안 될까. 서랍 안에 아쉬움을 숨겨 놓는다. 그때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런 일이 있어도 내가 잘 이겨냈다면, 그때, 그때, 그때가 서랍 안에 담긴다. 서랍이 이사 트럭 위에서 덜컹덜컹 흔들려도 안에 숨겨 놓은 것들이 쏟아지지 않도록 테이프를 둘둘 감는다. 그냥 버리면 될 텐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