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
봄에게 (2024)
원래 그런 건 가져본 적 없다는 듯이 잎 하나 없는 빈 나뭇가지를 휑휑 흔들던 나무에도 새로운 싹이 돋았다. 어느새 꽃이 피었단다.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봄이 왔단다. 나는 봄을 맞아 털갈이를 하고 있다. 지난 계절동안 북실북실하게 붙어 있던 겨울의 입김 같은 것이 봄비를 따라 흘러갔다. 언제나 이렇게 봄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매번 겨울에 취하는 것은 내가 미련한 탓일까.
겨울이 지나갔단다. 찬 바람에 움츠리던 계절이 끝이 났단다. 바닥을 구르는 플라타너스 잎사귀를 보면서 감상에 빠지던 철이 결국 끝이 났단다. 나는 그 계절에 듣던 노래를 여전히 흥얼거리면서 봄을 맞았다. 차갑고도 서러운 노래들을 흥얼거리면서.
아침에 대문을 열고 나왔을 때, 골목 앞의 목련 나무에 목련이 막 피려는 것을 보았다. 곧 피겠네, 생각하곤 늦은 오후 즈음 집 앞으로 돌아왔을 때 목련이 활짝 피어 있었다. 출근길을 따라 벚꽃이 피었다. 엊그젠가 분홍색이 군데군데 보이는 듯하더니, 어제는 그게 조금 커졌고, 오늘은 나뭇가지를 가릴 만큼 꽃이 피어났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길가의 작은 나무들 사이에서 갓 자라난 연두색을 보았다. 나는 괜히 손을 뻗어 연두색을 손으로 비벼 보았다. 혹시 나에게도 연두색이 묻게 되지 않으려나.
그러나 봄은 연두색이고, 봄은 분홍색이면서, 봄은 파란색이고, 봄은 하얀색이면서, 나에게 그런 봄의 색을 나눠주지 않는다. 목련은 어느 날 갑자기 후드득 떨어져 바닥을 적셨고, 벚꽃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작은 새싹들은 색이 짙어져 다른 잎사귀들과 섞인다. 나는 봄의 어느 색도 내 손에 묻히지 못하고. 아아. 나는 봄의 어느 색도 닮지 못하고.
어느 계절에는 그렇게 눈이 온단다. 그래서 그렇게 눈이 올 적에 나는 눈이 내려 흐려진 시야 사이에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겨울에는 그럴 수 있었다. 차갑고 서러운 계절이기에 내가 몸을 덜덜 떨고 울어도 괜찮았다. 그런 노래를 흥얼거려도 괜찮았다. 겨울바람은 매섭고 차가워서 금방 울음소리를 저 멀리 떠나보낼 수 있었다. 울지 말아라 하는 이도 없이, 그 계절에는 원 없이 울 수 있었다. 그래서 신발에 진창이 된 눈이 따라붙던 날에, 입에서 나온 숨결이 뿌옇게 보이던 차가운 날에, 나는 봄이 되면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스한 봄날을 기다렸다. 그런 따듯한 날이라면 남은 이들도 조금은 따듯하게 나를 보내주지 않을까, 그런 따듯한 봄이라면 나를 좀 더 따듯하게 기억해주지 않을까. 그래서 봄날을 기다릴 수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에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나는 여전히 차가운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하더라도, 신발 아래에 눈 대신 짓이겨진 꽃잎들이 밟히는 계절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날이라면 사람들이 날 잘 보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계절이 끝이 났다. 습관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끝을 기다리던 그런 계절이 지나갔단다. 언제나 이렇게 끝이 날 것을 알면서도 매번 봄을 기다리는 것은 내가 미련한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