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어쩌다 (2024)
꼬르륵. 퇴근을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뱃속에서 작은 울림이 반복되고 있는 걸 느낀다. 아침부터 종일 굶었다. 요즘 바쁜 탓에 아침 점심을 모두 거르고 있다. 나는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저녁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배달 어플을 켜고 파스타? 햄버거? 덮밥? 수많은 메뉴들을 보면서 무엇을 먹어야 이 허기를 채우면서도 단 한 끼의 식사를 만족스럽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버스 창 밖으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가 둥실둥실 떠가고 있다. 민주보다 조금 앞서 날갯짓을 하고 있는 그 천사는 얼마 전 민주를 운명으로 이끄는 업무를 받아 선배 천사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예요.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새 업무를 받은 신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죠? 당신이 민주씨를 그쪽으로 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고요, 큰 운명의 갈림길에서 당신이 똑 부러지게 일해줘야 민주씨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 운명이란 걸 단순하게 봐선 안 돼요. 당신이 일을 잘못하면 전체의 흐름이 바뀌게 될 수도 있는 거예요. 민주씨의 운명이 바뀌면 다른 이의 운명에도 영향을 준다는 얘기죠. 정신 똑바로 차려요. 신입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민주의 운명에 대해 10페이지로 정리한 서류를 건네줬다. 그날부터 신입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그 10페이지로 정리된 서류를 토대로 천사는 매일 하루의 방향 같은 것을 분 단위로 끊어 계획을 세워두고, 그때그때 민주가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버스가 신호에 걸렸다. 큰 운명의 방향에 따르면 민주는 오늘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 민주의 인생을 통으로 바꿀 수 있는, 이를테면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날이다. 천사는 버스보다 빠르게 날아가 신호등을 지나쳤다. 바로 다음에 있는 버스 정류장 위에 멈춰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낸다. 봉투에서 나뭇잎을 탈탈 털어 꺼낸 천사는 버스 정류장 주변과 그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에 그것을 뿌렸다. 그리고 버스가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배달 어플을 아무리 보아도 먹고 싶은 게 없다. 어유, 뭐 먹지, 배는 고픈데.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았다. 자그만 식당이 하나 보인다. 출퇴근길에 지나갈 때마다 보는 작고 작은 식당이었다. 처음엔 간판이 없어 무얼 하는 곳일까, 했는데 알고 보니 식당이었다.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돈 만원을 내고 예약을 하면 그날의 특별한 메뉴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라고 했다. 그 식당에 대해 알아보는 것조차 어려워서 동네 이름, 주변 식당의 간판, 그 식당에 간판 대신 붙어 있던 화살표 모양의 구조물 같은 걸 조합해서 쳐본 다음에야 얻은 정보였다. 차가 밀리는지 버스가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화살표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하차벨을 눌렀다. 집에 가려면 아직 5 정거장은 가야 했지만 나는 이번 정류장에서 내리기로 했다.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두 개 건넜다. 버스가 들어온 방향을 따라 길을 되돌아갔다. 화살표 아래의 유리문을 밀며 열었다. 문이 밀리면서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저기, 예약 안 했는데, 혹시 식사되나요?
젊은 여자가 들어오세요, 하면서 손짓을 했다. 나는 그 손짓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작고 따듯한 빛의 조명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꽤 어두웠다. 그래도 조명의 색 덕인지 포근한 느낌이 드는 실내였다.
사실 예약 손님만 받는데요, 마침 오늘 예약이 취소가 되어서 자리가 남아서요. 저희 가게 와 보신 적 있나요? 준비된 메뉴가 있는데 그걸로 드려도 괜찮으실까요?
아이구, 그러셨구나. 감사합니다. 그대로 부탁드릴게요.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주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잠시 멍하니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다. 따듯한 조명. 벽 이곳저곳에 걸려 있는 작고 큰 그림들. 한쪽 벽면에는 손님들이 붙이고 간 듯한 메모지들이 뒤죽박죽 붙어 있었다. 가게 안에는 큰 8인용 테이블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곳의 오른쪽 끄트머리에 앉았다. 문과 가장 멀고, 주방과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바질 크림 파스타였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잘 모르는 식당에서 내가 주문하지 않은, 누군가의 바질 크림 파스타가 나왔고, 그걸 지나가는 길에 충동적으로 들어온 내가 먹고 있는 이 상황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저기, 예약 안 했는데, 혹시 식사되나요?
내가 포크를 들고 막 한 입을 먹으려는 순간 종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종소리를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젊은 남자가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종소리를 따라 나온 주인이 남자를 보고 잠시 당황하더니, 나를 향해 혹시 같이 식사하셔도 괜찮으신가요? 하고 물어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를 향해 손짓을 하면서 들어오세요, 라고 했다. 손짓을 따라 들어온 남자는 내가 앉은 곳의 반대편 끄트머리에 앉았다. 문과 가장 가깝고, 주방과 가장 먼 자리였다. 남자는 의자를 살짝 들어 올려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를 빼서 앉더니 또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
편안하게 식사하셔도 돼요. 저도 예약 안 하고 온 참이라서요.
나도 모르게 남자를 향해 말을 건넸다. 남자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앞에도 나와 같은 메뉴가 나왔다. 바질 크림 파스타. 나는 천천히 포크를 움직였다. 남자는 밥도 조용히 먹었다. 문득 먹고 있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살짝 보니 볼이 빵빵해지도록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 게 희미한 조명 너머로 보였다.
밥을 다 먹고 계산을 하고 나올 때까지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밥 먹는 소리도 내지 않고, 그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조용하게 식사를 했다. 나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5분이 조금 안되게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두둑해진 배를 슬쩍 내려다보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듯한 빛을 받아 불그스름하던 볼, 웃으면서 생기던 보조개, 창 밖으로 그런 게 스쳐 지나갔다.
천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민주를 쫓아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지? 안돼. 안돼. 천사는 머릿속이 어지럽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대로라면 민주는 운명의 상대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면 천사는 그걸 바로 잡기 위해서 아주 많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일정표를 꺼내 볼펜으로 선을 찍찍 그었다. 버스는 집으로 향하고 있었고, 벌써 업무용 핸드폰에 전화와 메세지가 쌓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제대로 한 거 맞아요? 팀장이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럼요! 언제나처럼! 저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천사는 벌벌 떨면서 말했다. 팀장은 그럴 리가, 뭔가 잘못되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니겠어요? 어떻게 할 거예요? 라고 했고, 마지막 질문에 천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천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어떻게 된 거야. 이럴 리가 없는데.
정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챙겨 먹었다. 잠깐 쉬다가 책을 읽기로 하고 책을 하나 꺼냈다. 특별한 책은 아니었고 엊그제 서점에 갔다가 표지가 예뻐서 산 책이었다. 책날개로 대충 표시해 둔 곳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책장이 넘어가는 사이에 문득 어떤 사람이 웃는 모습이 허공에 떠올랐다. 나는 책장을 넘기다 말고 그 사이에 떠오른 모양을 가만 들여다봤다. 그리고 서둘러서 책을 덮었다. 핸드폰을 들고 다시 또 동네 이름, 주변 건물의 간판 같은 것, 화살표 같은 키워드를 가지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려 그 가게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전화번호를 눌러 놓고 또 한참을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한, 4일 전 저녁에 다녀간 사람인데요, 라고 하자마자 주인이 무척 반가워하면서 다행이에요, 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뵙네요.
주말 점심의 붐비는 카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카페 의자를 빼면서 그런 말을 하니 그 사람이 고개를 들고 보조개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남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나뭇잎을 하나 꺼내서 손바닥 위에 올리고 내게 내밀었다.
이걸 두고 가셔서요. 그래서 연락처를 남겨뒀어요.
어디 끼워 놓기라도 했었는지 반질반질하게 마른 나뭇잎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뭇잎을 집어 올렸다. 어리둥절했다. 이 나뭇잎을 내가 두고 갔다고? 처음 보는 나뭇잎이다. 나는 그 당황스러움을 그대로 얼굴에 내비치며 제가 두고 간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했다.
그럼, 천사라든지 요정이라든지, 그런 게 흘리고 간 것 아닐까요?
네?
운명이라든지, 뭐, 그런. 아닙니다. 아무튼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천사도 그 나뭇잎은 처음 보는 거였다. 평소 쓰는 나뭇잎과 다르게 조금 더 넓고, 큰 나뭇잎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 쪽 천사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역시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운명을 믿으세요?
운명이라는 단어가 왠지 생소하게 느껴져서 다시 되물어봤다. 남자는 다시 보조개가 드러나게 웃으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아니요?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난 거 보면 운명이지 않을까요?
나는 손에 올려진 작은 나뭇잎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운명일까? 운명이 뭘까? 천사나 요정 같은 건 또 무슨 얘기일까. 모르겠다.
잘 모르겠네요.
내가 그렇게 말하니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뭇잎을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으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했다.
민주의 담당자로 근무를 시작한 지 3년 차가 된 천사는 이제 텅 빈 일정표를 들고 다녔다. 대신에 그는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0페이지의 서류 대신에 3년의 기록이 적혀 있는 두꺼운 노트를 들고 민주의 행동, 생각, 감정 같은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선배,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동기들은 일정표 짜기 바쁘던데요? 보조 담당자로 들어온 후임이 천사에게 물었다. 응, 괜찮아요. 운명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후임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누가 만듭니까? 저희가 일 안 하면 다 엉켜요. 천사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쓱 올렸다. 글쎄요. 누가 떨어트렸을지 모를 나뭇잎 한 장 같은 것이 만드는 것 같은데요. 후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천사는 그를 뒤로 하고 민주를 따라 날았다. 길 건너편에 보조개가 인상적인 남자 한 명이 민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주도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손을 흔들었다. 신호등이 바뀐다. 어떤 흐름에 맞춰서 그 자리에 가게 된 수많은 자동차들이 멈춰 섰다. 민주는 남자의 품에 꼭 붙어서 걸음을 옮긴다. 어떤 흐름을 따라서 그 주변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친다. 마주 잡은 손바닥 사이에서 얼핏 풀 냄새 같은 게 봄바람에 날린다. 누가 떨어트렸을지 모를 작은 나뭇잎의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