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24)

창문

by 김민주

일기 (2024)


일기를 쓰기 위해서 앉았다. 펜 뚜껑을 열고 한참 펜을 돌리기만 했다. 적고 싶은 마음은 적지 않고 적고 싶지 않은 것을 적었다. 줄 사이를 가지런히 채운 글자들을 가만 보다가 다시 뚜껑을 닫는다. 마음은 뚜껑 안에 가둬 두고.


텅 빈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낀다. 어떻게 풀어놓을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나는 자꾸 뚜껑 안에 마음을 가둬 놓는다. 나만 열어보는 자그만 일기장일 뿐인데도, 닮은 모양은 한 글자도 적어 놓지 못한다. 애꿎은 것들이 상처받을까 봐. 애꿎은 것들은 내 일기장을 열어보지도 못하는데. 애꿎은 것들은 내 일기장을 열 생각도 하지 않는데.


아니에요. 실은 애꿎은 당신들이 상처받을까 봐서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는 것이에요.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싫어서 그래요. 정말 못나게도, 나는 편안히 내려놓을 마음을 가지지 못했어요. 사실 뚜껑은 단지 뚜껑일 뿐이고, 나의 마음 어느 것도 담아 놓지 못할 것인데도. 나는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뚜껑 안에 마음을 넣는 시늉을 해요. 꺼내지 않을 거야. 들키지 않을 거야. 마음은 만져지지도 않으면서. 어떤 마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라도 하면 마음이 덜어질까 해서요. 못생긴 마음을 그렇게 숨겨 놓고파서요.


일기장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다시 펼쳤다가, 다시 덮는다. 메모장을 켜놓고 마음에 있지도 않은 가짜 마음들을 적으려고 안달을 내다가 모두 지웠다. 창문을 열었다가 닫는다. 들키지 않을 거야. 보여주지 않을 거야. 못난 마음은 숨겨 놓을 거야. 비치지 않을 거야. 가짜 마음은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손가락 끝에서 일그러진다. 가짜 마음도 쓰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애꿎은 봄을 탓하고요. 애꿎은 겨울을 탓하면서요. 괜히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서 슬픈 척을 했다가요. 얇은 나뭇가지를 뚫고 올라온 작은 나뭇잎을 보면서 쓸쓸한 척을 했다가요. 그랬다가요.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면서 저어기 계단 아래로 마음을 굴려 보내요. 오늘도 일기장에 아무것도 적지 못 하고요. 나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요. 그래서 의미가 없는 글자들을 일기장에 옮겨 놔요. 그것들이 계단 아래로 굴러간 마음을 가려줄까 해서요. 실은 그 마음조차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을지 모르는데도요.


굴러간 마음은 어디로 갈까. 의미 없는 글자 사이로 어떤 것이 데굴데굴 굴러 떨어진다. 나는 애써 모른 체하며 잠자리를 찾는다. 다시 깨어났을 땐 어디로 마음을 굴려 보내야 할까. 멀리멀리 배를 태워 보내야 할까. 배에는 마음이 탈 수 없을 텐데도 그런 생각을 하곤 하는 거예요.

매거진의 이전글하늘은 파랗고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