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오렌지 (2024)

노랑에 핫핑크, 아니, 보르도.

by 김민주

당신은 오렌지 (2024)


니가 왠지 밉더라.


둘이 남겨진 틈을 타서 나는 재빨리 그런 말을 했다. 둘이 있으니까 하는 얘긴데, 하면서. 봄의 낮과 밤은 참 다르다. 따듯하게 햇빛을 내리쬐다가도 어두워지면 아직 주변을 서성이던 겨울이 말을 걸 듯 찬바람을 보내기도 한다. 나는 겨울 동안 가지고 있던 미운 마음을 전해야 했다. 바람이 우리의 곁을 서성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서 흔들리는 걸 본다. 나는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바람이 그녀의 볼을 식게 만들까 봐 걱정이 됐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손을 마주 잡았다. 어디선가 따라온 가로등 불빛이 손을 쬐어주고 있었다.


얘기해 줘서 고마워.


나는 그녀를 보면서 오렌지를 떠올리곤 했다. 톡톡 튀고 상큼한 사람. 그러면서도 달짝지근한 사람. 노랑이라기엔 좀 더 진했고, 빨강이라기엔 좀 더 여렸다. 분홍색 같으면서도 여리여리한 분홍은 아니었다. 그보단 노랑과 분홍, 빨강이 죄다 조금씩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노랑에 빨강을 조금 탔더니 개나리색이 되었다가, 이건 좀 부족한데, 싶어서 핫핑크 같은 걸 와르르 쏟아 만든 색 같았다. 밝고 아이 같으면서도 마냥 세상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으며, 그러면서도 톡톡 거리는 귀여움을 가졌고, 그러면서도 사탕처럼 오래도록 입 안에서 녹는 사람 같았다. 그녀가 내 말을 듣고서 얘기해 줘서 고마워, 라면서 내 손을 잡았을 때 어쩌면 핫핑크보다는 보르도 같은 색을 섞어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진하고, 조금 더 성숙한 색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 돌아오면서 내내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의 진한 오렌지맛이 입안이 아니라 위장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 그녀에게 편지를 쓸 적에 우리는 운명인지도 몰라요, 같은 말을 했었다. 실은 내가 운명을 믿지 않으면서, 그런 말로 그녀를 잡아두고 싶었다. 운명이라는 말로 엮어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운명이라는 말 아래에서 돌고 돌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비겁한 인간이다. 그래놓고 그녀의 오렌지를 탓하다니. 새콤한 향이 위장에서 거슬러 올라와 입 안을 맴도는 것 같았다. 이런 운명이라니. 이런 운명. 나는 이런 운명이 조금 야속하다고 생각했다가, 그럼에도 주황빛 가로등 아래에서 손을 마주 잡는 것을 보아 그런 운명이라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헤어지게 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알기 힘든 안도감을 느낀 것이다.


조금은 쌀쌀한 밤바람 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친 바람 너머로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고 섰다가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초봄의 틈에 남아있던 겨울바람이 녹는다. 뜨거운 마음 사이에 주먹 만한 오렌지 하나가 데굴 구른다. 껍질을 벗겨 나 하나, 너 하나 입 안에 나눠 넣고 지난 겨울바람을 이야기한다. 뜨거운 여름 공기를 가르며 향긋한 내음이 흩어진다.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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