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거리
너—나—너—그리고 너—- (2024)
민주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 보내본다. 발 앞으로 한 칸 한 칸 계단이 이어지고 있었다. 민주는 계단을 올려다보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방금 발을 디뎠던 한 칸은 곧 발아래의 한 칸이 되고, 위에 있던 한 칸에 체중이 실린다. 1초에 한 칸, 이 계단은 그렇게 오르게 되어 있다. 모두가 똑같이 1초에 한 칸을 오른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이 계단 위에 오른다. 1초가 지나면 한 칸을 올라가 있고, 아래칸에는 새로 태어난 이가 선다. 1초가 또 지나 두 칸을 오르면 태어났던 이가 한 칸을 오르고, 새로 태어난 이가 그 아래에 또 서게 된다. 민주는 쉼 없이 발을 움직이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가깝게는 세 칸 위, 오른쪽에 남자 한 명이 있었고, 한 칸 아래에 여자 둘이 있었다. 그 위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어떤 이는 저 위 멀리에 있어 발 끝만 보이고, 어떤 이는 저 아래에 있어 정수리만 보였다. 어떤 이는 같은 칸 위에서도 오른쪽 끝에 있고, 어떤 이는 중앙에, 어떤 이는 그 옆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후로 민주는 최대의 난관을 겪고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민주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 모두가 휘청이고 있었다. 다행히 그나마 우비를 입고 있고,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거센 바람을 타고 벼락같은 비가 민주의 얼굴을 뚫어버릴 듯이 때리고 있다.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얼굴을 계속 쓸었지만 그걸로 해결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계단을 타고 물이 철렁철렁 내려와서 자꾸 발을 헛디뎠다. 한 번 더 발을 헛디뎌 민주가 크게 휘청거렸다. 덜덜 떨리는 다리로 다음 칸을 올랐을 때 왼쪽 위칸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 때문에 그조차도 선명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여자가 계단 위를 데굴데굴 굴러 아래로 떨어지는 게 빗줄기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자칫하면 굴러 떨어진다. 그럼 모든 게 끝이다.
꾸역꾸역 참았던 것들이 터졌다. 1교시가 시작하기 전 학교에서 뛰쳐나갔다가 8교시가 시작할 즈음 붙잡혀 들어왔다. 교무실 앞에서 손을 들고 서 있다가, 상담실로 끌려갔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앞에 앉혀놓고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따듯한 눈빛을 머금고 이야기를 꺼냈다.
자퇴를 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어, 민주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잠시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또 다른 말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한 귀로 선생님의 말씀을 흘린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제가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그 후로 몇 사람이 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위에서부터 굴러 내려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민주의 한 칸 아래에 있던 여자 한 명도 굴러 내려가 보이질 않았다. 민주는 손까지 쓰면서 기어가듯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위에서 우산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내려오고 있었다. 민주는 우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놓으니 발아래로 빗물이 모여 만든 물줄기가 거세게 민주의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민주는 우산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안간힘을 쓸수록 다리가 더 후들후들거린다. 가까이 왔을 즈음 팔을 주욱 뻗으면서 발을 헛디뎠다. 철렁 내려앉은 마음을 부여잡고 계단을 다시 오른다. 우산은 민주를 지나쳐 더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우산이 문제가 아니다. 구르면 끝이야. 구르면 끝.
늦은 밤, 선배가 집 앞 놀이터에 있다며 연락을 해왔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컴컴한 놀이터에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닿고 있었다. 그 희미한 불빛 사이에 선배가 멀뚱 서 있다가 나를 보고는 손을 살살 흔들어 보였다.
민주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어. 너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선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무리다. 차가운 비바람에 민주는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민주가 폭풍 사이에 우뚝 일어섰다. 이제 끝이야. 난 더 이상 못하겠어. 민주가 한 발을 계단 위에서 뗐을 때, 무언가가 휘익 바람을 가르면서 민주 앞에 떨어졌다. 제법 탄탄해 보이는 밧줄이었다. 잽싸게 밧줄을 잡았다. 밧줄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니 선배가 몸에 밧줄을 휘휘 감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민주와 선배 사이사이에 다른 이들이 몇몇 더 붙어 있었다.
선배!
민주가 부르니 선배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밧줄을 몸에 감은 채 비 사이를 오른다. 민주는 밧줄을 손목에 감았다.
폭풍우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여전히 힘들고, 점점 다리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나에겐 밧줄이 있다. 나보다 몇 칸 위, 몇 십 칸 위, 몇 백 칸 위에서 내려준 밧줄. 어느덧 계단의 3분의 1 가량 올라왔다. 나보다 몇 칸 아래, 몇 십 칸 아래, 몇 백 칸 아래에서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