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2024)

유리병

by 김민주

눈동자 (2024)


작은 유리병 하나가 발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입에 담배를 물고 멀뚱히 유리병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어디서 굴러온 유리병인지 모르겠다. 흡연장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사람이라든지,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냥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유리병이 굴러서 내 발 앞에 멈춘 것이다. 입에 문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다 눈에 들어가서 손으로 담배를 옮겨 잡았다. 눈을 끔뻑거렸다. 닫혔다 열렸다 반복하는 시야 사이로 유리병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보이길 반복했다. 다시 담배를 물면서 이 유리병이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본다. 아무렴 어때, 신발 끝으로 유리병을 툭 찼다. 유리병의 단단함이 신발을 타고 느껴졌다. 멀리 밀어내진 못 하고 겨우 한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굴렀다. 굴러가는 모양을 보고 있다가 불이 꺼진 담배를 뒤늦게 보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유리병은 입구가 꽤 넓었다. 손가락 세 개쯤은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음료가 담겨 있었을 것 같았다. 입구에 뚜껑을 돌려 닫는 홈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의 몸통은 매끈했다. 음료였는지 뭔지 모르겠지만 포장지가 있었던 흔적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길이에 한 손에 적당히 들어올만한 둘레였다. 어디선가 굴러온 유리병임에도 깨끗해 보였다. 꼭 누군가 잘 씻어서 소중히 가지고 있다가 흘린 것 같았다. 정말 그럴진 모르겠지만. 어쩌면 며칠 전에 비가 왔으니 그때 구르면서 씻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럼 오히려 더 지저분해지게 되진 않으려나? 모르겠다. 아무튼 깨끗하고 매끈한 유리병이었다. 나는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서 멍하니 배경화면에 마우스를 딸깍딸깍 거리면서 유리병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유리병이 왜 자꾸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예뻤나? 예쁠 것도 없었다. 그냥 흔한 유리병인걸? 나한테 필요한 물건인가? 그럴 리가. 쓰레기일 뿐인걸, 그걸 어디다 쓰겠어? 그 유리병으로부터 도대체 무엇이 남아서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사무실을 잠그고 나와서는 다시 사무실 앞의 흡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그 유리병에서 무엇이 남은 건지 알아내려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 유리병에서 무엇이 흘러나왔는지 알아내야겠다.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문을 열고 나가서 오른쪽으로 두 번 모퉁이를 따라 돌면 흡연장이 나왔다. 한 번, 그리고 두 번째 모퉁이를 돌았을 때 누군가 눈앞에서 짧게 악 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엇,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옆 사무실의 직원인 것 같았다. 몇 번인가 복도 같은 데서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여자는 멋쩍게 웃으면서 아니에요, 죄송해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금방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손에 살포시 쥐어져 있는 유리병이 보였다.


어, 그 유리병.


내 목소리를 따라 그녀의 시선이 다시 찬찬히 내 눈으로 옮겨진다.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유리병을 잡고 있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급하게 굴었다.


엇, 어, 앗, 혹시 이 유리병, 선생님껀가요? 죄송해요. 오늘 하루 종일 여기 있길래 주인이 없는 건 줄 알았어요.

아뇨, 아뇨, 제 거 아니에요. 유리병을 보러 온 건 맞는데.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는 그녀는 다시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유리병을 보러 온 건 맞다, 라니. 유리병을 키우기라도 하는 거냐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보 같은 말을 했다 싶어서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후로 우리는 종종 흡연장에서 만나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유리병을 손에 살포시 쥐고 왔다. 매끈하고, 깨끗한 유리병 안에 나는 이름을 모르는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만날 때마다 굳이 유리병을 챙겨 나오기에 내가 그걸 왜 이렇게 들고 오느냐, 물었더니 유리병 보러 오는 거 아니에요? 라며 짓궂게 웃곤 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유리병을 들고 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이름을 모르는 그 식물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창가를 따라서 작은 유리병이 줄을 지어 서있다. 나는 조용히 양손에 유리병을 나눠 들고 방에서 나와 물을 갈아주고 있었다. 슬쩍 열린 방문 틈새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양손에 유리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막 잠에서 깨어난 이의 뽀얀 얼굴을 한 번 보니 새삼스레 목을 타고 올라온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창문틀 위에 다시 유리병을 올려놓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매끈한 뺨이 둥그렇게 휜 입가를 따라서 올라가는 게 보인다. 손을 뻗어 뺨을 살살 만져보다가 내 손 위로 포개지는 흰 손등을 바라보면서, 발 끝에서 툭 굴러가던 병 하나를 떠올렸다가 그 유리병을 살포시 잡고 살랑살랑 걸어오는 모습을 떠올린다.


오늘 날씨가 좋네, 당신 눈동자가 엄청 반짝거려.


내 말을 듣곤 눈을 동그랗게 접으면서 웃는다.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선선한 바람이 넘어온다. 유리병에서 줄줄이 자라난 이름 모를 식물들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바람을 따라 들어온 볕이 유리병을 지나쳐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람을 보다, 볕을 보다, 내 손을 따라 고개를 내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본다. 동그랗고 맑은 눈동자 두 개가 눈을 타고 들어와 마음속을 살랑살랑 걸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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