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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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노트를 아끼는 소설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듯이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남동생이 말을 할 적에 빠르지 못하면서 잘 골라진 말들을 했던 것처럼 그의 일기들도 대체로 그랬다. 한 글자 한 글자 느리고 정성 들여 쓴 듯한 글씨체에, 한마디마다 긴 호흡이 있었을 것이 느껴졌다. 고민하고 고민한 짧은 글들. 나는 그 일기장을 볼 때면 항상 놀고 있는 한 손으로 제 손바닥이나 손등, 마땅치 않으면 팔뚝에 상처가 날 만큼 꼬집고 긁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글들을 읽기가 힘들었다. 짧은 한마디에도 죽은 동생의 마음이 그렁그렁 매달려서 내 책상 아래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한자리에 앉아 일기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날엔 바닥 아래로 동생의 마음이 가득가득 떨어져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주저앉아 바닥을 마구 내려쳤다. 바닥 한가득 곶감이 으깨져 찐덕찐덕 내 손을 따라 올라왔다.
왜 그랬어. 왜. 그러게 내가 니 손목을 잡았을 때, 왜 말하지 않았어. 왜. 왜. 살아만 있다면 머리를 쥐어박고 이놈 자식아, 혼쭐을 내주고, 등짝을 마구 갈겨주고 싶었다. 가슴팍을 있는 대로 두들겨 패면서 귀에서 피가 나도록 욕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손날에 멍이 들도록 내려쳤고, 동생이 내게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던 것처럼 책상 위의 노트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죽은 동생의 마음만 똑, 똑, 아래로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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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딸들을 보러 올라왔다. 남편에겐 단단히 일러두었다. 헛소리할 거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말고, 조심해서 말하라고. 그만큼 나는 불안했고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남편이 운전을 하는 내내 차 주변을 뱅뱅 도는 죽은 개를 보았다.
뭐 하러 왔어, 금방 또 운전해서 가야 하는데. 피곤하게.
딸애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시 헤어지는 참이었다. 저녁을 먹는 시간은 별다를 것 없었다. 첫째와 둘째가 티격태격하며 밥 먹는 것을 흐뭇하게 보면서 밥을 먹었다. 저래 보여도 꽤 우애가 좋아서 정작 잘 싸우지도 않고 잘 지낸다. 첫째가 주로 말을 하고 농담도 해가며 밥 먹는 시간 동안 우리는 다들 웃었다. 첫째가 밥을 먹는 걸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래서 윤희 아줌마한테 그러겠다고 했다고?
응, 빽빽대면서 시끄럽게 하니까.
윤희와 나눴던 대화를 전하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귀를 열어둔 채 밥을 먹고 있었고, 둘째는 틈틈이 대화에 끼어들고 있었다. 내가 잠깐 둘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큰애가 밥을 한입 물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그 애한테서 난생처음 보는 얼굴을 보았다. 그냥 넋이 나간 얼굴 같기도, 반대로 엄청난 것들이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툭 건드리면 그 애 입에서 방금 물었던 밥이 아니라 흙탕물 같은 게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고, 그 애 몸 구석구석에서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 걸어온 발자국 한 칸 한 칸마다 고단함을 묻히며 내게 걸어 들어왔던, 지친 기색이 완연했던 그 어느 날들. 이제야 딸애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알 수 없으면서도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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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쑥대밭이었다. 남동생의 죽음을 우리는 원망했다. 우린 어디 가서 함부로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쑥덕거렸다, 그는 죄인이었고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죄인의 가족이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동생의 죽음에 제대로 마음을 보여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슬픔은 있었기에 우린 마음 아파했고 그 아픔을 어찌할 줄 모르다 죽은 동생에게로 화살이 돌아간 것일 테다. 나 역시 맞을 이가 없는 화살을 잡고서, 동생의 일기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동생을 원망했다. 떨어지는 비가 스미는 것을 보며 사라짐에 울었던 동생이라면 그에겐 아플 일이 얼마나 더 많았을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곶감을 실은 내게 주고 싶었다. 자긴 곶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쓰여있었다. 우리 누나가 곶감을 좋아하노라고,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자기가 줘야겠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걸 왜 얘기해주지 않았느냐고 여전히 맞을 일이, 앞으로도 맞을 일이 없을 동생에게 화살을 쏘아대며 울었다. 내가 그리 울고 있으면 죽은 개가 어김없이 내 주위를 빙빙 돌았고, 또 내가 그리 울고 있으면 엄마나 아빠가 나타나 화를 마구 내었다. 엄마, 아버지의 화살이 내게로 향한 것이다. 아무렴 맞을 이가 없는 화살을 쏴대는 것보다는 맞는 이가 있는 쪽이 좀 더 그 아픈 마음을 풀어줄지도 모른다. 나는 맞는 이가 없는 화살을 쏘고 또 쏘며 울다 문득 그 애 얼굴이 떠올랐다. 배짝 말라서, 모판을 들곤 눈물을 슥 닦던 얼굴. 밤이 되면 벽 너머로 들리던 숨죽인 울음소리. 화난 얼굴로 날 내려보던 눈동자. 그리고 초침이 다시 반대로 뱅글뱅글 돌아서 옆집 담벼락 뒤에 서서 발로 돌멩이를 굴리다 나를 낚아내었던 작은 손과 내 손에 풀잎 하나를 얹어주던 그날의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다시 눈을 뜨면 동생은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 내 주위를 누나, 누나, 하며 쫓아다녔다. 아가야, 동생아, 얘야, 나는 날리던 화살 중 하나를 낚아채어 내 가슴에다 내리꽂아버린다. 아아. 나의 동생, 너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는 얘기해주고 있었다. 이 얇은 노트 한 권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어도 그 배짝 마른 몸으로, 화난 얼굴과 그 눈동자로 나에게, 우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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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의 노트에서 그렁그렁 떨어져 내려오던 그의 마음들과 닮아 있었다. 꼭 그런 것들을 닮은 게 딸애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밥이 잘 넘어가질 않았다. 새삼 살 빠진 딸애의 얼굴이 더 핼쑥해 보였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 애도 그랬었다. 그즈음 해서 몰라보게 살이 빠졌었다. 급하게 속이 미슥거리고 머리가 아파졌다. 딸애가 갸우뚱하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엄마, 왜 그래?
아니야,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그래? 그래서 왜 왔어, 여기까지. 윤희 아줌마 얘기해 주려고?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식구들이랑 밥 먹으려고 온 거지.
딸애가 한 번 더 갸우뚱하더니 내 앞에 두통약을 한 알 내밀어 놓곤 밥을 한 술 떠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