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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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큰애한테서 걸려오는 전화가 다시 늘었다. 나는 그 애가 전화를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보다는 매일같이 오는 전화에 그 애에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엄마, 나 애기 때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던 거 기억나지? 그때 어쩌다 그랬더라?
요즘 주된 이야깃거리는 옛날이야기가 많다. 딸애가 먼저 물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나도 이것저것 회상하며 대답해주곤 한다. 그 애가 물어오는 옛날이야기는 생각보다 깊이 파고들고, 가끔은 나의 옛날이야기까지 요구하곤 한다.
엄마.
왜.
삼촌 노트. 아직 갖고 있어?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요즘 날씨는 아무래도 종잡을 수가 없고, 이상하리만큼 비가 자꾸만 내린다. 이러다 물에 잠겨버리는 건 아닐까, 창 너머로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수화기 너머에선 딸애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넘어온다.
엄마, 듣고 있어?
엄마, 듣고 있냐구. 나 그거 읽어보고 싶어. 다음 주에 가지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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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나는 남동생의 노트를 더 열어보지 못했다. 그 노트를 열어보는 건 이제 더 이상 남동생의 아팠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되지 못하고, 혹은 남동생을 원망할 빌미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나는 그 노트에서 멍울져 떨어지던 것들에 휩싸여 울면서 내 머리를 쥐어박고 내 가슴에 화살을 덕지덕지 꽂아놓았다. 그건 자책감이었다. 누나가 되어서, 누나씩이나 되어서도 나는 몰라줬다. 동생이 그 반듯한 손가락으로 이렇게 마음 아픈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난 몰랐고, 이 일기장에서 떨어지고 있는 마음들이 동생의 속에 있다는 걸 난 몰랐다. 나는 몰랐다. 동생이 그렇게 죽으리란 걸, 난 몰라줬다. 내가 막지 못했다. 그래서 노트를 더 이상 펼치지 못했다. 펼칠 때마다 나는 이제 동생이 죽었다는 것보다 내가 동생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더 힘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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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았어요. 나는 계속 돌고 있어. 같은 자리를. 벗어난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돌아왔어. 어차피 이렇게 다시 돌아오고 돌아올 것이라면 이제 정말 끝을 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자는 낡은 노트를 덮고 한참을 멍하게 벽을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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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삼촌, 글을 굉장히 잘 쓰셨었네.
응. 책 읽는 걸 좋아했어. 엄마도 책 읽는 거 좋아했으니까, 둘이 같이 책 읽고 많이 그랬지.
딸애가 정말로 동생의 노트를 가지고 간 뒤로 딸애는 종종 제 삼촌 얘기를 했다. 본 기억도 나지 않을 제 삼촌을 마치 최근까지 봤던 사람 얘기하듯이 친근하고 정감 있게 부르면서.
엄마.
응.
엄마,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었어? 마음 아파서.
죽은 개가 제자리를 돌다 멈춰 서선 멀뚱히 나를 쳐다본다. 다시 그 몸통이 통통해지고, 생기가 돋는 눈으로 나를 반가워하며 헥헥댄다.
가지고 있고 싶었어. 남겨둔 게 많지 않았거든.
대단하다, 엄마. 대단해. 엄마도 마음고생 많았겠네. 근데 이제 그러지 마.
그러곤 다시 또 옛날이야기들을 물어온다. 했던 얘기를 또 묻고 또 묻는다.
엄마, 나 태어났을 때 말이야.
다시 또 생각하기를, 나한테 뭔가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걸까, 생각했다.
했던 얘기를 왜 자꾸 물어?
그냥 자꾸 까먹어서 그래. 그래서 어쨌다고 했더라, 나 태몽이 뭐라고 그랬지?
나는 다시 또 배려를 한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겠지. 기다려주면 제가 준비되었을 때 이야기해주겠지. 어쩌면 이게 그 애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했던 얘기를 또 해주고 또 해준다. 딸은 처음 듣는 얘기인 것처럼 꺄르르 웃으며 내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