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찢기> 8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이해'라는 것 자체가 세상에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맞다. 이해라는 것 역시 내가 만든 찢어진 동그라미의 세상에만 존재한단 얘기다. 이해하려는 태도, 노력, 마음이야 알겠다만 그런 것들이 이해에 닿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해보자면, 당신이 내 인생을 살아봤냐는 거다. 당신이 삶 안에서 보는 나, 당신의 삶을 통해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당신의 삶 속 나일뿐이다. 당신의 범주 안에서 당신의 규칙에 따라 읽히고 있는 나, 그리고 그걸 두고 당신이 나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응, 맞다. 내 세상 안에서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야만 한다.
그 뿌리 깊은 불신, 어쩌면 반대로 아주 굳은 믿음일지도 모르는 '이해'라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런 모양이다. 나는 너를 절대 이해할 수 없어. 너도 나를 절대 이해할 수 없지. 원래 세상이 생긴 모양이 그래. 우리는 서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야. 그러니까 이해하려고 하지 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니, 때로 우리는 왜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느냐 질책하게 되고, 때때로 마치 이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서 서로를 우습게 알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맞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나를 이해하면 생기는 일들을 상상해 본다. 내 삶을 살아본 것도 아닌 당신이 나의 이 깊은 불신과 굳은 믿음에 대해서, 마치 내 삶을 살아본 것처럼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살아본 듯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알 수 있다면, 이해라는 걸 해버린다면. 나는 내 삶의 어떤 시간과 기억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 세상 안에서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무언가를 깨부수지 않고, 그것을 끌어안은 채, 지금도 괜찮다고, 원래 세상에 이해란 없어서 이해받을 수도 없는 거라고, 불신과 믿음을 탄탄히 다지면서 살 수 있으니까.
"그냐앙. 그냥 사는 게 힘들어어."
"원래 사는 게 힘들어."
어차피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면, 오늘은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내내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자식이 어떻게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단 말을 당당하게 떠든단 말인가. 그래서 내내 엄마를 사랑하는 척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가까운 사람을 붙잡고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해왔다. "나는 엄마한테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껴. 나는 엄마 밑에서 자라면서 너무 힘들었어.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전부 엄마 때문인 것만 같아. 그래서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엄마를 닮을까 봐 무서워. 항상 엄마를 닮지 않으려고 애써. 엄마처럼 말하지 않고, 엄마처럼 행동하지 않으려고." 그럴 때면 누군가는 나를 토닥였고, 누군가는 사랑받았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 하는 나를 탐탁지 않게 봤고, 누군가는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나를 안쓰럽게 여겼다. 아니, 그 모든 이가 사실 나였다. 나는 그런 내가 싫으면서도 불쌍히 여기곤 했다. 그래서.
엄마와의 기억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그 시리즈 작업을 하는 내내 나는 울면서 그림을 그리고, 과제 발표 때도 울었다. 그때의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상처받았다는 말도 단 한마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림 속의 나는 트럭에 치여 울고 있었고, 방안은 어수선하게 무너져 있었으며, 그 그림을 발표하고 있는 나도 울고 있었다. 그 맘 때 나는 그 그림을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매일 밤 친구를 붙들고 엄마가 밉다고 울곤 했지만, 그림을 본 사람들은 내가 엄마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 톨도 알지 못한 채 나를 안쓰러워했다. 교수님은 엄마 된 입장에서 하는 얘기라며,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더 울었는데, 그 울음의 의미를 지금 와 해 보자면 그 순간의 나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저는 엄마를 몹시 미워하는데요! 그런데도 제가 사과를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마를 못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지금처럼요!" "우리 엄마는 교수님처럼 저에게 그런 얘기해주지 않아요! 그게 절 더 힘들게 만들어요! 당신은 우리 엄마가 아니니까!" 그러므로 원래 세상에 이해는 없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이해'를 없애기 위해서 그런 말을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말을 해야 안다고 했다, 엄마는. 말을 해보라고. 무슨 일이 있냐고. 내가 울 때마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내가 밥 한 끼 먹으러 집에 갔다가 대성통곡을 했던 날에도, 미술 입시가 한창이던 때 문득 울면서 집에 들어왔던 날에도, 고등학교 자퇴를 하고 싶다며 무릎 꿇고 앉아 울기만 했던 때에도. 엄마가 내게 무슨 일이 있느냐, 왜 그러냐, 물을 때마다 나는 입이 꽉 틀어막힌 것처럼 말도 없이 울기만 했다. 내가 편지에 죽고 싶단 말을 적었을 때에 엄마는 집을 나가라고, 당신을 협박하는 거냐 따져 묻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니 구태여. 내게 엄마는. 그러니까.
"그냐앙. 그냥 사는 게 힘들어어."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한 것은 엄마는 내가 말을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역시나 엄마는 "원래 사는 게 힘들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세상이 생겨먹은 모양새에 태초부터 '이해'라는 게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선명한 신념을 만든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데도 내 세상이 이런 꼴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 손으로 방을 부수게 될 것이다. 달리는 트럭에 몸을 던질 것이다. 죽은 나를 부둥켜안고, 죽어버린 나를 싫어하면서도 안쓰러워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역시 그러면 안 되겠죠? 세상에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딸이 있다니. 그런 딸이 버젓이 살아 동그라미를 찢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니. 혹은 트럭에 몸을 던지겠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세상에는 '이해'란 없는 걸로 하죠. 그냥 그런 거라고, '원래 사는 게 힘든 것'처럼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