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짐이 아닌 순종함이 없던 요나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예언하고 그들을 돌이켜야 하는 것은 요나의 사명이었다.
우리나라에게 '일본'과도 같은 존재였던 바빌로니아에게 회개를 전하고 그들이 돌이켜 구원을 얻는 것은 요나에게는 한없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쪽의 바빌로니아가 아닌 서쪽의 다시스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탔던 배는 광풍을 만나 집채만 한 파도와 싸워야 했다.
폭풍 속에서 살기 위해서 그들은 배에 실었던 짐을 버렸다. 그러나 그 광풍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는 당연한 우선순위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봤을 때도 그러게 하는 것이 순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하는 것!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해결하는 것보다 먼저 시작되는 것은 묻는 행위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일까요?
허나 그것은 점을 치는 행위처럼 어느 곳에 성공이 있을까요? 가 아니다. 마치 요나의 선택이 성공이 아니라 바다에 빠지는 것이었으니까...
하나님은 요나가 물에 빠지길 바라셨다.
'아 내가 말을 안 들었으니 즉결처형이구나'하고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인과에 따른 처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처음부터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타 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다가오는 풍랑, 이미 직면한 풍랑 배가 뒤집히는 경험을 하고 있다면 버려야 할 것은 배안에 싣고 가는 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에 불순종하고 있는 나의 마음이다. 옛 자아의 본성인 요나다.
그 요나를 바다에 던져야 구원에 이른다. 그래야 배에 싣려 있는 성공도 구하고 나의 마음에 탐심, 옛 자아의 죄성등이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요나는 폭풍 앞에 죽음을 보았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음 너머의 부활과 우리의 생명을 보았다.
단 하나의 차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크리스천은 이런 '사랑'을 알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많이들 그런 사랑 알기를 그친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