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고 대로변에서 춤추고 싶은 이 기분
내가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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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로 바빴던 부모님은 짐승같이 자라던 나와 동생들을 조부모님 손에 맡겼다. 나는 종종 할아버지의 술친구가 되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집안과 밖으로 술병을 숨겨두셨는데 나는 그곳을 잘 기억했다가 몰래 할아버지께 알려드리곤 했다. 감나무 아래, 소여물 통 아래, 포도밭 옆 비닐하우스의 문 뒤에 걸린 망태기 안. 보물이 묻힌 곳을 찾는 해적처럼 우리는 집을 항해했다. 그는 술병을 한 손에 들고 세상에서 내가 최고라고 하셨다. 만선의 어부와 나는 멋진 육지 동료였다. 작은 탁상을 앞에 두고 할아버지가 술을 한 잔 드시면 나는 그가 깎아둔 배나 생무 한 조각 먹었다. 흥이 오르면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로 꼭 한 곡만을 계속 되풀이해서 들으셨는데, 청춘을 돌려달라는 가수의 늘어진 테이프 목소리가 더 구슬프게 들렸다. 잔뜩 취해 기분이 좋은 날 끝에는 내게 항상 한 말씀을 남기셨다. 네 놈이 장손이었다면 참 좋았을 것을.
2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주로 밭일을 하셨다. 포도, 고추, 옥수수, 배추, 고구마, 파, 상추, 깻잎, 오이, … 우리가 먹는 대다수를 심고 키웠다. 나는 가끔 포도를 여물게 하는 봉투를 가져다 나르거나 수확이 끝나고 고춧대를 뽑거나 모으는 자질구레한 일을 거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허리를 펴고 숨을 돌릴 때마다 나를 보며 입을 모았다. 기집애라 아쉬워. 나는 웃으며 고춧대를 더 얹어 들었다.
3
할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꺼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주에 1번씩 시외에서 오는 선생님에게 2-3명이 과외를 받았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텃밭에 뭔가 키워보려고 검정비닐을 구매했는데 너무 크고 쓸 수가 없어 누가 필요하다면 가져가라고 했다. 고추인지 감자인지, 할아버지가 땅에 검정 비닐봉지를 뒤집어씌우는 일을 하셨던 게 기억이나 내가 가져가겠다고 했다. 선생님의 차 뒷자리에 비스듬히 있는 농업용 비닐봉지는 생각보다 컸다. 대충 봐도 내 키의 두 배가 넘어 보이는 이 비닐 롤을 어떻게 들고 갈 것인가. 굴리자니 찢어져서 소용이 없을 텐데. 선생님의 도움으로 일단 오른쪽 발 위로 올려 세웠다. 끌어안고 한 걸음씩 조심히 걸어보니 할만했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수업했기 때문에 지름길로 조금만 힘쓰면 된다. 가파른 경사로를 한 걸음씩 떼며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할아버지가 때마침 뒷간에서 나오셨다. 어이구 소리와 함께 호쾌한 웃음소리가 나를 반겼다. 그는 이 일을 회상할 때면 늘 어린놈이 어떻게 그걸 가지고 올 생각을 했냐며 기가 차며 뿌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암, 보통 애들 같으면 무겁고 귀찮은 걸 들고 올 생각도 안 할 텐데. 그걸 지 혼자 안고 왔다니까!? 웬만한 놈들보다 낫지. 암!! 아주 기특해! 그 어린놈이 집에 보탬이 될 것 같단 생각을 누가 하느냐고. 아, 거-참. 사내새끼였으면 무슨 일이든 하나 했을 거야.”
4
섬엔 아픈 사람이 생기면 뭍으로 올라가야 한다.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게 된다면 육지에 사는 가족·친지 누군가가 간호하게 된다. 우리 집에선 인천으로 시집간 고모가 오래 그 역할을 도맡아서 했었다. 할아버지가 암에 걸리셨다. 국립암센터에 잠시 계셨었는데 모두가 사정이 좋지 않았다. 대학 입시 기간이라 시간이 여유로웠던 나는 잠시 고모의 업을 대리했다. 드문 가족들이 할아버지를 보러 올 때면 나를 대견해하며 안쓰러워하며 그의 안녕을 위한 수고를 부탁했다. 가족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는 나의 육지 동료였기에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약 한 달 정도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며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색전술 과정에서 위에 구멍이 나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게 되면서는 말씀을 더 잃으셨다. 간혹 힘이 돌았던 날에 그는 남겨질 자식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네가 남자였으면 아버지에게 큰 힘이 되었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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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떠나고 나는 오래 아팠다. 그는 산에서 작은 풀꽃을 꺾어다가 탁상 위 물컵에 꽂아 놓는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독학으로 배운 영어를 가볍게 했었고, 나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쪼그려 앉아 조기와 고구마나 감자를 구워주는 따뜻함, 두 개의 창고와 마당을 몇 번 오가면 뚝딱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지만 할머니와 시장을 가면 반걸음 뒤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뒷짐을 지고 가며 그녀를 살피다 풍경을 즐기는 그만의 흥취가 있었다. 고되게 일한 날은 푹 쉬었고, 여유로운 날엔 ‘앗싸라, 앗싸랄하게 살아야 한다’라며 술과 음악을 슬프게 즐겼다. 그는 그 외에도 많은 기억을 나에게 주었다.
내가 그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할 때마다 그와 닮지 못한 내가 미웠다. 그의 바램을 이뤄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