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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Jul 23. 2019

배운 사람

논어 학이편 7장

2019년 5월. 낮에는 햇빛 받기 좋고 저녁에는 다소 쌀쌀해 바람막이를 걸쳐야 하는 초여름이었다. 배달일은 늘 바람과 함께 다니기 때문에, 체감온도가 일반인들보다 더 앞서는 직업이다.

여름에는 아스팔트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달리고, 겨울에는 날 선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달려야 한다. 자연을 넘어서려는 듯 그 극심한 더위와 추위를 받아낸다. 그래서 그런지 웬만해서는 안 덥고, 웬만해서는 안 춥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의 서식지인 대학로에서 콜을 치는 중이었다. 주문 콜이 몇 개 없는 시간대라 좋은 콜을 골라잡을 순 없다. 대강 아무 콜이나 잡고 보니, 삼선동에 한 토스트 집이었다. 일단 조리요청을 누른 후, 다시 도로 위를 달린다.     


업소에 도착해 금액을 확인해보았다. 보통은 1만 원 또는 2만 원 정도를 주문하는데, 7만 원어치나 주문하셨다. ‘제길 괜히 잡았네. 조리시간이 오래 걸리겠구나.’

토스트집 아저씨는 나보다 더 불만이시다. 같은 토스트를 20여 개 시켰는데, 계란을 모두 추가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양심이 있는 거냐며 어떻게 계란을 추가할 수가 있냐며 투덜거리셨다. 그렇다, 아저씨는 오늘 일할 기분이 아니다. 여기다 대고 ‘계란 정도는 넣어 먹어야 맛있죠’라고 말해드려야 할지, ‘그분은 왜 이리 많이 시키셔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걸까요’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나는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 그래도 말한다면 가까이 있는 아저씨 편을 들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상상황이라 그런지 근처에서 밥집을 운영하시는 아내분이 지원하러 오셨다. 혼자 분주하신 아저씨에게 아주머니는 일의 순서를 정해주셨다.

“먼저 계란 좀 부쳐요.”     


그리고는 나에게 시간이 좀 걸리겠다며 얼음 가득한 냉커피를 한 컵 따라주셨다. 커피를 받아 들고 앞에 펴놓은 테이블 중 한 곳에 앉았다. 그 가게는 동네 주택가 사거리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골목 사거리치고는 널찍한 편이라 그런지, 가게 앞에 세월의 흔적이 심하게 느껴지는 색 바랜 야외 테이블 두 개와 박스로 만든 개 쉼터를 설치해놓으셨다.               

다른 테이블에는 동네 아저씨 두 분이 냉커피를 마시며 앉아있고, 개는 박스 위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토스트집 주인네들 빼고는 다들 한가롭다.     


나는 동네 주민들이 오가는 것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개가 동네 마스코트인지 아줌마와 여학생들은 개를 보고 인사하고 만지작거리며 지나가곤 하셨다. 그때 마침 작은 구르마에 박스를 수집하며 다니시는 할아버지가 지나가고 계셨다. 박스 수집하시는 분들을 보면 친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분들은 시골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생활하시다가 시골 일거리가 마땅찮아 져서, 아들들이 모여 사는 도봉구로 터를 옮기셨다. 가진 돈이 적지 않으셨는데, 근면 성실이 몸에 배셔서, 할아버지는 경비 일을 하시고 할머니는 동네에서 부지런히 리어카를 끌고 다니셨다.     


중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다닐 때는 모른 척 지나가기도 하고, 혼자 다닐 때는 인사를 하며 지나가기도 했다. 또, 내가 인사를 할 때면 손자라고 어김없이 돈을 쥐여주셨다. 만원 정도를 주셨는데, 참 받기가 불편했다. 길거리 박스를 종일 모아봐야 수입이 만 원이 안 될 거 같은데, 만 원을 주시다니. 그 한 장짜리 돈의 무게는 분명 일반 사람들이 버는 만원의 무게와는 같지 않았다. 그래서 또 주실까 봐, 마주치는 걸 피한 적도 있었다.     


마침 다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아저씨가 지나가는 그 할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더운데 커피 한잔해. 500원만 내. 나머지는 내가 낼게.”     


냉커피는 2천 원이었다. ‘저 할아버지에게 500원의 가치는 얼마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저 말투는 조롱하는 걸까 뭘까?’ 싶었다.

할아버지는 이내 빙그레 웃으시며 지갑에서 천 원을 꺼내 드셨다. 나는 또 괜히 의심해본다. ‘500원이 없으셔서 부득이 천 원을 내신 걸까. 그냥 천 원을 내신 걸까...’      


이내 이어지는 아저씨의 말에 나의 잡스러운 의문들이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돈을 쓰나 안 쓰나 한 번 떠본 거야”라고 하시며 냉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대신 결제하셨다.      


겉으로 드러난 말 표현은 있는 자의 교만함으로 비치지만, 마지막 결과는 그렇지 않으셨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셨던 건 거만한 듯한 말투 너머에, 커피를 드리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느끼셨던 것 같다. 그렇게 ‘현명한 아저씨’는 할아버지에게 커피를 사드리면서도 가난한 자를 도왔다는 명예 대신, 거만한 말투로 불쌍한 할아버지를 조롱한다는 불명예를 챙긴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돈을 꺼내는 데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던 그 자연스러움을 보면, 할아버지는 500원에 더해 1,000원을 내시며, 자기 힘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그렇게 한쪽 의자에 앉아 편히 커피를 드시는 동안, 두 아저씨는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나셨다. 나중에야 한가로이 앉아있던 할아버지를 본 가게 아주머니는 톡 쏘아붙이셨다.

“거기 앉아 계시면 어떡해요. 장사하는 데 앉아있지 말라고 했잖아요!”     


할아버지도 할 말이 있으신 듯 입을 오물거리셨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으셨다. 체념하신 듯 작게 한숨을 쉬시고는 자리를 뜨셨다. 앉아있을 자격이 있지만, 굳이 말하여 아줌마의 기를 꺾지 않으셨다. 그렇게 말하는 아주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신 듯했다. 다만 아줌마는 그 커피가 할아버지 커피인지 모르셨을 뿐이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를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믿음 있는 행동으로만 타인에게 신뢰를 보이셨다.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논어』에 나온다.     


子夏曰(자하왈)

賢賢 易色(현현 역색). 事父母 能竭其力(사부모 능갈기력), 事君 能致其身(사군 능치기신), 與朋友交 言而有信(여붕우교 언이유신).

雖曰未學(수왈미학), 吾必謂之學矣(오필위지학의).     


자하가 말했다.

“현명한 사람을 존경하기를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힘을 다하고, 임금을 모실 때는 자기 이익을 앞세우지 않으며, 친구와 더불어 사귈 때는 말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하는 공자와 40세 정도 차이가 나는 어린 제자이다. 현명한 이를 존경하는 것, 힘을 다하는 것, 자기 이익을 앞세우지 않는 것, 말이 믿음직스러울 것 등 이 네 가지를 이미 삶 속에서 행하고 있다면 이미 다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사람이거나, 혹 학사, 석사, 박사 따위의 증명이 없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배움에 지극히 힘쓴 사람임을 확신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배움이란 머리에 쌓은 지식으로 떠들어 대는 게 아니라, 사람 간에 지키고 따라야 할 오륜의 바른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감정의 휘둘림이 없는 제삼자의 자리가 아닌, 내가 그 할아버지의 입장이었다면 500원만 내라는 말과 앉아있지 말라는 말에 차분히 대응할 수 있었을까? 남들에게 쏘아붙이기를 즐겨 하는 일차원적인 내 성격을 생각해보면 장담할 수 없다.     


그 할아버지는 당장 드러난 말 표현을 넘어 그 사람의 그러한 심리까지 헤아리시고, 그들의 말에 따르셨다. 나는 저런 상황에서 얼마만큼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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