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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Aug 02. 2019

지위에 걸맞게 일할래요

어제저녁, 낮잠을 잠깐 잔다는 게 좀 길어져 오후 7시가 다 되어 눈이 떠졌다.

“음? 출근해야 하는데...”


이제 요즘은 지각을 해도 관제에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 스케줄을 원래 6시 출근으로 맞춰놓았었는데, 가끔 늦을 때 출근 독촉 전화가 오는 게 귀찮아서 출근시간을 7시로 변경해놔서인 것 같다.

아니면 오늘 휴일일 수도 있다. 스케줄 관리를 대충 하다 보니, 이제는 내가 출근인지 휴일인지 조차도 헷갈린다.


최근에는 점심때 일하는 중에 관제에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저 오늘 저녁에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스케줄을 빼야 할 거 같아요.”

“병선님. 오늘 휴무이신데요?”

“어?.... 그래요? 그럼 이왕 출근한 김에 할 수 있는 만큼 하다가 들어갈게요.”     


출근과 휴무를 알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진다. 점심 저녁 피크타임이 되면 그냥 기계적으로 출근을 하는 중이다. 아마 휴일 없이 일주일 내내 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오후 7시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려고 배달전용 앱인 ‘브로스’를 켰다. 브로스를 키니, 콜이 70개가 밀려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다. 어느 거부터 가야 할지 종 잡을 수 없는 무수한 콜.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편하게 돈 벌 수 있는 대학로에서 일하고 싶다.


순간 망설임이 일어났다.

‘브로스를 다시 잽싸게 끄고 대학로 가서 킬까? 아니야... 이미 내 위치가 관제에 노출됐을 텐데, 그렇게 하면 양아치 같은 사람으로 비칠 텐데... 어떡하지...’     


갈등이 찾아왔다. 명동 쪽은 가고 싶지 않고, 대학로로 가고 싶은데 이 많은 콜들에 힘들어하고 있을 관제를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은 대학로 쪽으로 들어가는 광화문, 명동의 콜을 잡는 것이다.


그때 마침 관제에서 전화가 온다.

“병선님. 출근하시는 거죠? 헤헤... 제가 대학로 쪽으로 들어가는 콜을 좀 넣어드려도 될까요?”     


나와 친밀도가 높은 관리자의 전화였다. 이 분은 나의 지금 현재 욕구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를 오래 경험한 탓이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관리자이다.     


그렇게 콜을 몇 개 받고 나서 다 친 후, 빈 배차 상태가 되어갈 때쯤, 다시 관제에서 전화가 온다. 다른 관리자였다.

“병선님. 내수동으로 가는 콜 좀 넣어 드려도 될까요?”

“음? 내수동이 어딘데요? 글쎄요 그건 좀 그렇네요.”

“네 알겠습니다. 다른 라이더분을 찾아볼게요.”     


이 분은 지금 내 마음을 잘 모르신다. 이제 대학로 가서 꿀을 좀 빨아보려고 대학로 근처까지 왔는데 다시 먼 곳으로 가라니, 내가 갈 리가 없지.     




이렇게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분이 또 있었다. 예전에 대학로에서 꿀을 빨고 있는데, 창신동으로 가는 콜을 몇 개 넣어줘도 되냐는 또 다른 관리자분의 전화가 왔다.

“아... 글쎄요. 아직 주문처리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고...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나의 거절에 수화기 너머로 ‘아씨...’라는 관리자의 탄식이 들려왔다. 내 순간의 성질 같아서는 기분이 나빠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려다가, 순간 급한 건가 싶은 마음이 들어 그냥 수락을 했다.

마침 들고 있던 배차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배차를 미리 계획적으로 착착 잡아놔야 관제에서 전화가 안 오는 데, 내가 순간 허점을 보인 탓도 있으니까.     




중간에 픽업하러 갔던 업소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아버지뻘 라이더분을 만나 인사를 했다.

"더운데 힘드시죠?"

"더운 것보다도 관제에서 부탁하는 콜 때문에 힘들어. 아까도 콜3개를 받았는데 그거 빼느라 1시간반이나 걸렸어. 자꾸 나를 (시간이 오래 걸려 인기가 없는)외곽 쪽으로 뺄려고 그러더라고."

"동선에 안 맞는 배차는 그냥 거절하시지...."

"동선? 그런 거 없어. 그냥 넣어."


저렇게 특수노동직에 속하는 지입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콜을 잡지 못하는 라이더들의 하소연을 듣고 있으면, 나는 괜히 마음이 착잡해진다.


하지만 나는 일하면서 배차 권유에 있어서는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다. 관제는 나에게 권유할 수 있고, 나는 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가고 싶은 콜인지 아닌지 의사표시를 먼저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상황의 부득이함의 정도와 나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라 갈지 안 갈지를 정하는 편이다.


나는 지입제니까, 내 지위에 걸맞게 일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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