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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Oct 05. 2019

도망갔으니까, 봐주지 마

주역 '화뢰서합' 괘

교통 벌점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던 2019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교통경찰이 사라져 고요함이 시작되는 밤 10시쯤은 마음 편히 횡단보도를 타고 서행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횡단보도를 타고 건너는데, 멀리서 싸이카(경찰 오토바이) 3대 정도가 줄지어 오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덤덤히 딱지를 받아 들고 착잡한 마음으로 갈 길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걸리면 벌점이 40점이 넘어 면허 정지가 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나는 보통 경찰이 부르면 도망갈 생각을 잘 못 한다. 어떤 경우는 내가 딱지를 끊기고 있는 동안에, 나와 똑같이 위반한 라이더를 경찰이 불러 세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차선을 바꿔 속도를 높여 잘 도망가셨다. 그걸 보고 있으니, 이 바닥은 왠지 말 잘 듣는 사람만 딱지를 끊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에게 미안했을까? 제일 싼 딱지로 끊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내 상황은 위태롭다. 이 위태로운 상황을 일단 면하고자 했던 나는 못 본 척하며 그렇게 상점가 길로 유유히 들어갔다. 하지만 하필 사람이 붐비고 있던 터라, 얼마 가지도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경찰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로 그 혼란함이 정리됐다.     


“도망갔으니까, 봐주지 마!”      


그렇게 벌금 4만 원에 벌점 15점을 받고 드디어 총 45점의 벌점이 된 것이다. 그러면 벌점 그대로 45일간 면허가 정지된다. 20년 배달 인생에 처음 겪어보는 면허 정지였다. 하지만 배달로 밥을 벌어먹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45일의 정지는 생계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는 기간이다. 일단 급한 대로 임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 일하다가, 벌점 감경 교육을 받으러 가야만 했다.          


교육에 대해 알아보니, 6시간에 36,000원짜리 법규 준수 교육을 받고 8시간에 48,000원짜리 현장 참여교육까지 받으면 벌점을 총 50점 빼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결국은 교통법규를 위반해서 돈 내고 벌점까지 쌓인 걸, 다시 돈 내고 벌점을 줄이러 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목적은 세금 수입인 걸까? 내 딱지값으로 복지 예산 마련하고, 교육비 값으로 교통안전공단을 먹여 살리는 건가?’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더구나 교육받으러 왔다 갔다 하느라 이틀이라는 시간까지 뺏기게 되니, 시간이 곧 돈인 알바생에게 있어 실제 비용은 딱지값을 제외하고도 30만 원(교육비+이틀 알바비) 이상이 드는 셈이었다.     


이런저런 많은 불만이 떠오르지만, 어쨌든 여기는 교통 ‘무(無)법지대’인 인도의 한적한 시골이 아니라 교통 ‘유(有)법지대’인 한국이라는 나라고, 현실은 면허증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형편이기 때문에 정지가 되면 곤란할 뿐이다. 가능성은 적지만, ‘뭐 또 교육을 받고 다시 태어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라며 자신을 스스로 애써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벌점을 40점을 넘기면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처음 몸소 깨닫고 나니, 이제는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면 몸이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지 움찔움찔 멈춰짐이 느껴졌다. 그래서 요즘은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있노라면, 예상과 달리 꼭 세금 수입에 목적이 있는 것만은 아닌 거 같았다. 『주역』에 이런 상황을 언급한 구절이 있다.     


初九(초구), 屨校滅趾(구교멸지), 无咎(무구).

초구효, 차꼬를 채워 발을 상하게 하니, 허물이 없다.

   


주역 화뢰서합 괘에 나오는 말이다. ‘차꼬’는 족쇄이고, ‘발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움직임을 강제로 멈추게 하는 지나친 형벌을 말한다. 지나친 형벌을 가하는 것은 초기에 잘못을 강하게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이상 더 큰 잘못을 범하는 허물(=잘못)은 없게 되는 것이다. 사소한 교통법 위반이라도 벌점을 부과해서 면허를 정지시키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큰 사고를 예방하려 함일 것이다.     


잘못한 거에 비해 과한 비용이 드는 형벌이라는 불만이 들었지만, 그들을 그렇게까지 몰아세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따끔한 방법으로 위반자를 교통 시스템 안으로 다시 되돌려 놓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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