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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Nov 15. 2019

각자 할 일을 할 뿐

장자 대종사

2019년 11월. 한겨레 신문 구독을 신청했다. 집주인 아저씨의 조중동 사상에 맞서기 위해 한겨레를 신청한 것은 아니고, 한문 공부하는 학당 선생님께서 자주 한겨레 문화 섹션에 나오는 좋은 글을 추천해주셔서다. 더불어 새벽 아침의 부지런함을 선물해주시는 신문배달원의 근면함을 이어받기 위해서이기도 한다. 신문이 배달 오는 새벽쯤에 맞춰 일어나, 전부터 꿈꿔오던 ‘새벽에 일어나 밤에 잔다’는 동양 정신의 핵심 테마인 ‘숙흥야매(夙興夜寐)’를 실천해본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하지만 매일 무료로 넣고 가는 서울신문만 오고, 한겨레신문이 오지 않았다. 한겨레 배달원의 조금 덜 부지런함에 아쉬워하며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오늘 오전은 비가 내린다고 예보가 되어있다, 다시 일어나 마침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보고 잽싸게 오토바이를 타고 목욕탕에 가서 신문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의 일터인 대학로의 ‘불가마 사우나’를 방문했다. 낮에 낮잠을 잘 겸 방문했을 때보다는 사람이 많았다. 탕 안에 물소리만 울려 퍼지는 그 고요함은 언제 들어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여탕은 모르겠지만, 남탕은 언제나 고요하다. 사람이 좀 있지만, 언제나처럼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할 뿐이다.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있어 나를 내심 놀라게 하는 백발 할아버지, 스마트폰에 물이 튀길까 봐 한쪽 구석에 뒤돌아 앉아있는 아저씨,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내가 있다. 


온탕에 몸을 푹 담그니, 그 안락함과 시원함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에 동조하듯, 탕 밖에 계신 아저씨는 지나가며 자기만의 감탄사로 화답한다. 마치 바람이 불면 저마다의 생명체들이 자기만의 울음소리를 내듯이.     


다들 각자 할 일을 하는 동안, 내 눈은 넓은 냉탕을 두르고 있는 해변의 풍경을 본다. 해변에 야자수 나무가 두어 개 심겨 있고, 한 커플이 아랫도리 수영복만 입은 채 어깨동무를 하고서 뒤돌아서 있는 그림이다. 그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의 상체에 더 눈길이 가는 건 내가 수컷으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탕 밖에서는, 귀찮지만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 남의 때를 밀어주고 계시는 아저씨와 사우나를 들락날락하는 아저씨 등 여러 사람이 모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누구 사정이 어떠하고 어떠한지 알고 있는 일은, 때로 피곤한 일이다.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위로하는 일을 개인적으로 잘 하진 않지만, 좀 하고 나면 가끔 피곤해짐을 느낀다. 그럴 때, 이렇게 서로 모른 채 자기 할 일을 하는 목욕탕은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 편안함을 장자는 말한다.     


泉涸(천후) 魚相與處於陸(어상여처어육), 相呴以濕(상구이습), 相濡以沫(상유이말). 

不如相忘於江湖(불여상망어강호).

與其譽堯(여기예요)而非桀也(이비걸야), 不如兩忘而化其道(불여양망이화기도).

샘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바닥에 남겨져, 입김을 불어 서로 적셔주고, 거품을 내서 서로 적셔준다. 

그러나 그것은 강이나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만 못하다. 

요임금을 찬양하고 걸왕을 비난하기보다는, 두 가지를 다 잊어버리고 자연의 질서인 도(道)에 동화되는 것만 못하다.



장자의 말을 과감하다. 그래서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묶여있는 사람이 들으면 반발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에 노관심인 사람이 들으면 맞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물고기들이 마른 땅바닥 위에서 서로를 걱정하며 입김을 불어주고, 거품을 내어 적셔주는 행위’는 우리가 옆 사람과 함께 감정을 공유하며 안쓰러워하는 행위를 빗댄 것이다. 그러기보다는 그냥 목욕탕 안처럼 서로의 사정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장자는 말한다.

‘요임금을 찬양하고 걸왕을 비난하는 것’은 당명을 집어넣으면 이해가 쉽다. 민주당을 찬양하고, 새누리당을 비난하는 것, 또는 새누리당을 찬양하고 민주당을 비난하는 것 등 이 양쪽의 일들을 다 잊고, 홀연히 도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편 나눠서 더 나은 방향을 있다고 떠들어대고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해도, 어차피 자연의 큰 흐름인 도(道)에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잘한 인간 세상의 흐름보다는 그 큰 흐름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라고 장자는 말하는 것이다.      


그 큰 흐름과 하나가 되었던 편안함을 마치고, 가져온 신문을 정독하며 남들 세상사에 관여해본다. 사실 정치가 이렇든 저렇든, 나라 경제가 이렇든 저렇든, 배달하며 먹고사는 데는 사실 아무 지장이 없다. 개인적으로 경제가 좋을 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 좋더라도 배달일로 집을 살 기회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또 나는 지켜야 할 땅과 재산도 없어서, 나라 걱정은 내 할 일이 아니다. 나라가 없어지면 가장 아쉬워할 사람은 가진 자들이지, 적어도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사를 모른 채 그냥 각자 할 일을 하는 게 가장 좋지만, 가끔은 옆 사람과 재미 삼아 떠들어볼 요량으로 세상의 소식을 좀 알고 지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사람들과 떠들 때는 이런 공통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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