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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품 없는 미술관

오츠카 국제 미술관 관람 후기

by 이상균

우리는 일본에 갈 때 별 일정을 잡지 않는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늘 그렇듯 긴 산책을 하고, 계획 없이 이곳저곳 길거리를 기웃거리다 예쁜 카페에 들러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기로 했다. 그리고 저녁나절에는 고독한 미식가 흉내를 내며 오래되어 보이는 뒷골목 선술집에서 절임 요리를 곁들여 니혼슈를 주문하겠지. 우리의 여행은 대개 그렇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이벤트가 있었다. 오츠카 국제 미술관이라는 곳에 들르는 것이다. 오츠카 국제 미술과는 포카리스웨트로 유명한 오츠카 그룹이 사회 환원을 위해 건립한 곳으로, <최후의 만찬>부터 <모나리자>, <천지창조>, 렘브란트, 카라바조, 빈센트 반 고흐, 에드바르트 뭉크 등 인류 역사상 중요한 미술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이 맞았다. <모나리자>는 웬만해서는 루브르 박물관을 떠나지 않는다. <천지창조>는 시스티나 대성당에 있다. 게다가 고흐, 뭉크의 주요 작품이 같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일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런데 이 미술관은 어째서 이러한 작품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오츠카 미술관의 작품들은 모두 정교한 재현작들이다. 오츠카 미술관에는 진품이 하나도 없다. 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든 작품들은 모두 오츠카 그룹 계열사인 오미 도업 주식회사의 특수 기술을 동원해 만들어졌다. 도판에 실물 원화 이미지를 전사한 뒤, 1300도의 고온에서 도판을 굽고, 복원 전문 화가들이 붓으로 디테일을 표현한 후 다시 작품을 고온 처리한다.


오츠카 국제 미술관에 전시된 고흐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재현작.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제공.


피카소의 아들과 미로의 손자들, 각국 미술관 관장과 큐레이터들이 완벽한 복제 상태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니 원본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의 재현 수준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츠카 그룹은 진심이다. 오츠카 국제 미술관은 매년 원본 그림에 대한 저작권료로 전 세계 미술관들에게 1천억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있다.


사족: 혹시 이 장면에서 "진품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진품과 똑같은데, 어째서 오츠카 국제 미술관의 작품은 진품보다 가치가 낮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와 같은 질문을 떠 올린 이가 있다면, 아래에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링크하겠다.




IMG_2586.jpeg 마드리드에 갈 수 없다면 이것이 최선


아마 모두에게 죽기 전에 눈으로 꼭 보겠다 마음먹은 미술품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나에게 운명적인 작품은 이것이다. 이 작품에 얽힌 사연은 언젠가 다른 글에 써 보겠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과 얽힌 스토리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가볼 생각이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는 어렵다. 나는 한 번에 일주일씩 열흘씩 휴가를 낼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최선이 아닐까? 나는 딱 그 정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오츠카 미술관은 도쿠시마 역에서 버스(17번)를 타고 1시간 15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다. 우리는 거의 입장 시간에 맞춰 거기에 도착했다. 한두 시간 정도 관람하고 점심을 근처에서 먹고 돌아오면 되겠지? 이런 가벼운 기획은 기대처럼 끝나지 않았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나는 두 달 안에 이 미술관에 다시 돌아갈 것이다.




<천지창조>가 아니라 시스티나 대성당 자체가 재현되어 있다


티켓을 끊고 입장하면 바로 만나는 것은 <천지창조>를 비롯한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대성당 벽화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이미 압도된다. 나는 <천지창조> 정도를 복사하여 벽에 걸어둔 것 정도를 기대했다. 사이즈를 원본 대비 1:1 정도 해주는 센스 정도야 있겠지, 딱 이 정도 기대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재현되어 있는 것은 <천지창조>, 혹은 그를 비롯한 벽화 따위가 아니다. 시스티나 대성당 자체가 1:1 사이즈로 재현되어 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체험이었다. 시스티나 대성당을 갈 수 없다면, 혹은 가지 않고도 그에 근접한 체험을 해보고 싶으면 오츠카 미술관에 가보라. 나는 죽기 전에 반드시 가봐야 할 장소에 시스티나 대성당을 추가했다.


IMG_2564.jpeg 공간이 필요한 미술품들은 이렇게 공간 자체와 함께 재현되어 있다


IMG_8262.jpeg 렘브란트의 <야경>, 원본은 네덜란드 국립 미술관 소장.


고대 그리스인들의 작품부터 시작한 관람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로 이어진다. 미켈란젤로, 다빈치, 보티첼리가 등장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이 등장하다 이어 렘브란트, 카라바조, 루벤스, 페르메이르 등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나타난다. 쫓기듯 20분 만에 점심을 먹고, 다리와 허리가 아파 중간에 15분 커피 브레이크를 가졌을 뿐 나는 관람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폐장 시간까지 미술관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전체 분량의 절반 밖에는 관람하지 못했다.


내가 관람한 작품은 1천여 점이다. 아마도 오츠카 미술관의 전시품은 2천여 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토요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도쿠시마에 왔고, 관람 일정은 일요일에 잡았는데, 안타깝게도 오츠카 미술관은 월요일이 휴관이다. 나는 미술관을 절반만 관람한 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늦은 봄에 휴가를 하루 더 내고 여기에 돌아오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도쿠시마가 아니라 고베에 호텔을 잡고(오츠카 미술관은 고베에서도 1시간 20분 거리다) 관람하지 못한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등 근대의 작품들과 현대 미술들을 관람할 것이다.


IMG_2592.jpeg 의외로 <모나리자>급 인기를 끌고 있었던 페르메이르의 대표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기업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가 아닐까? 오츠카 그룹에 존경심이 생길 정도로 강렬한 체험이었다.


그렇다, 여기에 원본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과 <별이 빛나는 밤>의 원본을 하루에 볼 수 있는가? <모나리자>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고,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교회에 있으며, <별이 빛나는 밤>은 뉴욕 근대 미술관에 있다. 우리는 어차피 물리적으로도 원본들의 실재에 닿을 수 없다.


미술을 좋아하는 분은, 혹은 미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꼭 한 번쯤은 가보시기를 권한다. 라캉식으로 유희를 덧붙인다면 미술관 전체가 대상 a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원본은 없지만 원본이 얼마나 강렬한 주이상스를 안겨줄지 충분한 상상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IMG_2579.jpeg 조르조네의 <La Tempesta(폭풍)>, 내가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부르스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의 표지로 쓰였던 그림이다. 원본은 베니스에 있다.




진품과 가짜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글을 하나 링크한다.


https://brunch.co.kr/@iyooha/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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