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이번 설에 본가에 가서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이 있나 찾아보았다.
본가에는 여러 개의 책장이 있지만, 역시 내가 읽었던 책들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책들을 내게서 밀어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책장과 아버지의 책장을 샅샅이 뒤져 꽤 중요한, 내게 의미 있는 책들을 찾아냈다. 오늘은 이 책들에 얽힌 내 얘기를 해볼까 한다.
밤을 새워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독서를 정말 좋아했던 시절에도 밤을 새워 책을 읽어본 적은 몇 번 없다. 그런데 그 몇 번 없었던 경험을 하게 해 준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천국의 열쇠>이다. 가톨릭 신부인 주인공 프랜시스 치셤이 중국에서 선교를 하며 겪는 이야기가 대강의 줄거리다.
이 책은 어느 방학식 날 구입했던 책인데, 무엇이 그리 흥미로웠는지 침대에 앉아 밤을 새워 가며 이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버지를 깨웠다. 그 아침에 강남역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모처럼 주말 아침에 늦잠을 주무시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채근하여 나는 강남역에 있는 서점에 갔다. (당시엔 강남역에 동화서적이라는 서점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천국의 열쇠>를 꼬박 밤새워 읽은 아침, 동화서적에서 A. J. 크로닌의 다른 작품 <성채>를 구입했다. <성채>를 품에 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아침도 먹지 않고 침대에서 까무러쳤다.
밤을 새운 아침에 사 올 정도로 열렬히 기대했던 책인데, 그런데 <성채>를 완독한 기억은 없다. 주인공이 의사였다는 것만 기억난다. <성채>는 지금도 내 책장에 꽂혀 있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들추어보아야겠다.
이 책을 구입한 것도 똑똑히 기억이 난다. 아랫 단락에 나올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내가 다니던 중학교 앞 서점이었다. 이 책은 매우 유쾌하면서도 심오한 내용이 담겨 있다.
주인공은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낀 나머지, 어느 날 갑자기 책상을 '양탄자'라고 부르고, 침대를 '그림'이라고 부르기로 결심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명사, 동사, 형용사 등을 자기 나름대로 바꾼 후 원래의 언어 까먹어 다른 이들과 소통을 할 수 없게 된다. 터무니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파롤(Parole)을 랑그(Langue) 삼은 남자의 얘기다.
이 책이 왜 중요한지 혹시 눈치를 챘는가? <하얀 로냐프강> 독자라면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이 없었다면 나는 <하얀 로냐프강>에서 검(劍)을 하야덴이라고 고쳐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하얀 로냐프강>을 쓰며 아펠르어와 안도칸어를 만들게 된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한 책이 바로 이 책, <책상은 책상이다>이다.
이 책도 내가 자주 드나들던 중학교 앞 서점에서 구입했다. 에리히 프롬의 이름을 어디에선가 들었던 모양이다. 서점 주인아저씨에게 에리히 프롬을 읽고 싶다고 했더니 주인아저씨가 추천해 준 책이다.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이 자신의 철학적 작업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쓴 가장 쉬운 대중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인아저씨의 안목은 탁월했던 것 같다. <소유냐 존재냐>가 말하는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에 대해 고민하기에 나는 가진 것이(소유한 것이) 너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순간 인간은 고독해지는데, 그래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으로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랑의 기술>에 담긴 얘기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주인아저씨는 정말 책이 좋아서 서점 주인이 되셨던 분이었겠구나, 하고 깨닫는다. 이 책을 추천해 줄 수 있었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 출신 철학자를 읽은 분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이 책의 의미라면, 아마도 이 책이 내가 삶에서 첫 번째 완독한 철학서라는 것. 여담인데 나는 중학생 때 <봄여름가을겨울>의 <아웃사이더>를 듣고 서점에서 하이데거를 뒤적거렸던 적도 있다. 다음과 같은 가사 때문이었다.
더부룩한 머리에 낡은 청바지
며칠씩 굶기도 하고
검은색 가죽 점퍼 입고 다녀도
손엔 하이데거의 책이 있지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내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어머니의 책장에 꽂혀 있었던 어머니의 책이다.
냉전시대의 이탈리아 시골 마을, 기독교 보수당 지지자 세력과 이탈리아 공산당 지지자 세력이 섞여 살고 있었다. 이런 마을에서, 두 주인공인 신부 돈까밀로와 열렬한 공산당 지지자이자 마을 읍장인 빼뽀네가 벌이는 사건이 담긴 옴니버스식 우당탕탕 코미디 소설이다.
어린 시절 친구인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앙숙이 되어 서로 으르렁거린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을 서로 갖고 있고, 마음속으로는 서로를 좋아하고 걱정하는 사이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웃기고 따뜻해서 여러 번 읽었다.
주인공 돈까밀로 신부가 정말 인상적인 캐릭터인데, 거구의 장한이고 힘도 엄청나게 세서 화가 나면 책상도 부수도 문도 때려 부순다. 게다가 사기도박 선수여서 카드 게임에서 지는 적이 없다.
또 한 명 재미있는 반전 캐릭터는 예수님인데, (본당 십자가에 매달린 조각품이다) 평소 사고를 치고 돌아온 돈까밀로를 나무라는 역할을 맡다가, 아들 세례명을 '레닌'으로 하려고 하는 빼뽀내와 돈까밀로가 격투를 벌이자 "지금 턱이 비었다, 쳐라, 돈까밀로."라고 조용히 힌트를 주기도 한다. 아무리 착한 예수님도 레닌만은 세례명으로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이쿠 점심시간이 끝나가서 어떻게든 글을 마쳐야겠다.
언젠가 내가 내게서 책을 밀어냈던 시절에 대한 얘기를 한번 써볼까 한다. 정신분석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얘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최근에 유년 시절을 기억하면 늘 '장마 기간에 마루에 앉아서 빗소리를 듣던 기억'을 떠올리는데, 이게 실은 빗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아니라 책을 읽었던 기억을 무의식이 은폐해 온 것임을 최근에 깨달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 장마를 좋아했던 것은 빗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가 오면 골목 친구들이 와리가리 하러, 짬뽕하러, 오징어 놀이하러 놀러 나오라고 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내게 충분히 책을 읽을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써보기로 다짐하면서, 오늘도 점심시간을 몽땅 때려 부은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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