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우민호 감독과 현빈 주연의 <하얼빈>이 곧 5백만 관객을 넘길 거라고 한다. 원작에 대해 찾아볼 분도 있을 것 같아서 예전에 써둔 독후감을 끌올 한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우민호 감독과는 좀 다른 관점에서 원작자 김훈은 <하얼빈>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다는 것이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지도 모르니... 역시 *약간의 스포일러 있음*
늘 그렇지만, 김훈은 불편한 글을 쓴다. <남한산성>을 읽으며 느꼈던 불편한, 혹은 외면하고 싶었던 것들을 보았을 때 느꼈을 만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다시 느꼈다.
성 안의 먹을 것이 부족할 때, 병사들은 굶길 수 있지만 말은 굶길 수 없다. 기병대야 말로 조선에 마지막 남은 전투력이었기 때문이다. 굶주린 병사들은 말이 굶거나 얼어 죽기를 바랐다. 나라가 망하든, 겨울을 못 넘기든, 그들에게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말이 죽으면 죽은 말고기로 끓인, 기름 뜬 말국이라도 한 그릇씩 받아먹을 있기 때문이다. 김훈이 그린 남한산성에는 대의나 숭고함은 없다. 김훈은 똥 냄새로 가득한 남한산성을 그리며 "그곳에도 사람이 있었다"라고 쓴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것보다, 김훈은 그 좁은 성 안의 추위와 배고픔에 대해 썼다.
<하얼빈>의 내용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고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하지만 김훈이 쓰고 싶어 했던 것은 그 내용이 아니었다. 우리는 막연히, 민족 독립에 경도된 용감한 애국자가 결연히 일어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수괴인 악당을 징벌하고, 자신도 체포되어, 담담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우리에게 독립운동은 신화의 영역에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펼치자마자 '당연히 그랬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것들과 대면하게 된다. 국가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자애로운 스승으로 모시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모두 이겼으니, 이제 전쟁을 멈추고 사해가 평온하며 동양 백성의 삶이 아늑하기를 기원하는 메이지 천황과, 세계정세를 한눈에 파악하면서, 언론에 발표될 사진의 구도까지 세밀하게 살피는, 유능한 정치가인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대게를 안주로 묵묵히 보드카를 마시는 청년 안중근과, 그의 거사 후 필사적으로 그가 더 이상 천주교인이 아님을 공표하며 그의 범행을 비난하는 재한 천주교회와, 이토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지에서, 메이지 천황에게 이토의 명복을 빌며 차마 그 문장 안에 범인이 '한국인'임을 표시할 수 없는(행간에 드러나는 미안함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순종 황제를 만나게 된다. 의외로 적법한 절차를 따라 진행되는 안중근의 재판과, 안중근의 의도 대로 충분히 주어지는 발언 시간에 놀란다.
김훈이 그려낸 안중근의 이야기는 영웅담이 아니다. <남한산성>의 이야기에 영웅이 없듯, 이 이야기에도 영웅은 없다. 평범한 한국인에겐 신화와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안중근의 이야기를 김훈은 또 담담히 쓴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었다"며. 영웅담을 대하는 김훈의 태도는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사실주의적이다.
물론 안중근의 행위 자체는 영웅적이며, 거사 부분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이 장면의 묘사에서 글자 단위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만큼은 꼭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 탐이 나서 읽고 또 읽었다. (그래도 이 대가의 솜씨를 내 것으로 할 자신은 없더라. 힌트를 주면, 조준선에 대한 묘사이다)
(2)편에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하겠다. <하얼빈>을 핑계로 소설가의 필력과 벽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인데, 소설을 써 본 사람은 꽤 깊게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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