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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2) 정신질환의 진단 (1)

우리는 거세되어 신경증자가 된다

by 이상균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검색 등으로 이 글에 유입된 분은 아래 글을 먼저 읽고 오세요.


https://brunch.co.kr/@iyooha/124




(1)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배웠다.


상상계는 나의 상상으로 출발해서 구축된 세계다.

상징계는 나의 외부의 규칙과 언어로 구성된 세계다.

실재계는 상징으로 포섭하지 못한 나머지 세계다.

실재계에는 상징계에는 없는 쾌락과, 상징계에는 없는 엄청난 고통이 있다.

우리가(인간이) 상징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실재를 직접 접하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1)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신질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병사들에게 여러 가지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증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의 시작은 늘 그렇듯,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도 분류로 시작됐다. 보고된 여러 증상들에 이름이 붙여졌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장애, 해리장애, 섭식장애... 이는 '분할과 정복'이라고 하는 오래된 과학적 전통을 따르는 방법론이지만, 라캉은 이런 방식(자연과학적 방식)으로는 인간 정신을 설명해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식사를 거부하는 거식증을 앓는 여성의 사례는 '식사장애'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데, 라캉이 보기엔 이러한 방법은 거식증이라는 말을 그저 동어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라캉에게 증상은 마음의 표면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라캉이라면 오랜 분석을 통해 그녀가 유년기에 구토를 많이 겪었고, 10대 때는 폭식증을 겪었으며, 20대 초반에 상습적으로 절도를 했고, 현재 주식 중매인으로 일하며 많은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는 것을 것을 확인하고 그녀를 히스테리로 진단할 것이다.


즉 라캉은 마음의 심층 구조를 분석한 후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떻게 우리가 사회화를 통해 심각한 정신병자가 아니라 평범한 신경증자가 될 수 있었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어떤 단계의 적절한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정신병을 앓게 되는지 밝힌다.


그런데 잠깐, 평범한 신경증자라니? 신경증자가 왜 평범하단 말이지? 혹시 눈치를 챘는가? 그렇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세상에 '정상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가벼운 신경증을 앓고 있다. (이 부분이 프로이트와 라캉이 가장 다른 점인데, 두 정신분석가 사이의 차이점도 언젠가 다른 날에 다른 글로 써 보겠다)


라캉이 말하는 평범한 신경증자는 보통 이러하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사회의 규칙을 잘 지킨다. 모범생은 아니었어도, 선생님께 꾸지람을 많이 듣지는 않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아저씨를 만나면 불편해한다.

남들과 비슷한 꿈을 가졌다. 좋은 학교를 가서, 좋은 직장을 얻고 싶어 한다. 언젠가 큰돈이나 명예를 얻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산다.

두어 가지 이상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있다. 퇴근하고 배우자와 맥주를 한잔 하거나, 운동이나 산책을 한다. 가끔 큰 마음먹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확실히 리프레시 효과가 있다고 느낀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연인이나 배우자, 혹은 파트너가 있다.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나눈다. 가끔 포르노를 보며 어떤 변태적 행위에 성적 판타지를 가져보지만, 감히 파트너에게 따라 해 보자고 하지는 못한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대개 그 앞에서는 꾹 눌러 참는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껴도 사표를 던지지는 못한다. 가끔 술자리에서 그 장면이 떠오르면 동료나 친구들 앞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김부장 개새끼를 외친다.

포르쉐나 페라리, 샤넬과 에르메스를 갖고 싶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큰 보너스를 받아도 쉽게 그것들을 사지는 못한다. 그래도 보너스가 나왔는데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니, 대신 평소 가지고 싶었던 에어팟이나 립스틱을 사며 소확행을 느낀다.

환각을 보거나 환청을 듣지 않는다. 만약 헛것을 보면 눈을 비빈다음 내가 뭘 본 건지 다시 한번 살펴본다. 그리고는 '헛것이 보이다니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나...' 하고 중얼거린다.


어떤가, 당신과 비슷한가? 당신과 비슷하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훌륭한 신경증자다. 위에 적은 것들은 모두 라캉이 전형적인 신경증의 증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훌륭한 신경증자로 성장했는지, 그 과정을 겪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살펴보도록 하자.




(1)편에서 막 태어난 아기에겐 상상계가 전부라고 얘기했었다. 그리고 12개월 차의 이유식과 18개월 즈음의 배변훈련을 계기로 아기는 규칙과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한다고도 얘기했다. 라캉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소외(alienation)라 명명한다.


라캉은 이 과정을 왜 사회화(socialize)와 같은 평범한 단어로 표현하지 않고 하필 소외라고 불렀을까?


사회는 타자(다른 사람, 他者, other)들의 세계다. (1)편에서 이미 얘기했지만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상징 중에 내가 만든 것은 없다. 남산도, 삼성전자와 대한민국도, 내가 지켜야 하는 학교의 규칙과 사회의 법도 모두 타자에게 속해있다.


아기는 상상계에 속할 때 엄마와의 교감을 통해 엄청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스스로 상상계를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젖을 포기하고 이유식 먹기를 선택하고, 아무 때나 응가를 하던 자유를 포기하고 배변 훈련을 받는 것이다. 아기는 이렇게 규칙이 지배하는 타자들의 세계로 진입한다.


행복했던 자신만의 상상계를 떠나, 모든 것이 낯선, 타자들의 세계를 살아가겠다는 결심, 그러한 결심은 타자들의 세계의 이방인이 되겠다는 결정이나 마찬가지다. 즉 이 과정은 이방인-되기나 다름이 없다. (소외는 영어로 alienation이고, 여기에서 alien은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라캉은 이 과정을 소외라고 말한다.


우리는 상징계의 이방인이 된다. 사진 한참 찍던 시절, <양재천, 우울> 시리즈 중 한 장


한편, 이 소외의 과정을 가장 노골적으로 작품에 드러낸 장면이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의 엔딩이다.


아스카와 함께 등교하고, 레이와 부딪혀 넘어지고, 미사토가 담임 선생님인 세상은 신지 안에 갇혀있다. 그 세상은 신지의 바깥쪽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세상은 신지만의 상상계다.


하지만 신지는 오랜 시간의 독백 끝에 세상은 상징으로 되어 있으며, 심지어 '나' 조차 상징(기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상징을 받아들이는 것, 즉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은 곧 타자들을 받아들이는 같다는 것도 깨닫는다.


신지의 상상 속에서 아스카는 신지의 여자친구이고, 레이는 전학생으로 등장한다.
나조차 기호임을, 상징임을 깨닫는 신지
지평에서의 선택


신지는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홀로 서 있는 자신의 세계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즉 상상계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위 화면을 보면 신지는 지평 위에 홀로 서 있다) 하지만 신지는 타자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즉 상징계로 진입, 어른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어른이 되겠다 결심하는 것은 상상계를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상상계를 떠나 상징계의 어른이 된 신지를 향해 모두 축하한다는 박수를 보내는 것 외에 어떤 엔딩을 상상할 수 있는가?


모두가 어이없어했을, 그러나 완벽한 엔딩


한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그 자체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해소 과정에 대한 직접적 은유다. 이 이야기도 대단히 재밌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역시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다음에 더 써보도록 하겠다.


자, 이제 우리는 소외를 경험하고 타자를 받아들였다. 아직 상징계의 모든 규칙을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규칙이 존재함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이 소외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실재계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다. 아기는 아직 자신의 방을 떠나본 적이 없지만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은 이미 그 해변에 있다. 실재계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지만 우리는 실재계를 천천히 차례대로 경험한다. 예를 들어 성은 대단한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성을 경험하는 시기는 우리 모두 각자에게 다르다.


아기의 쾌락은 처음엔 엄마의 젖과 보송보송한 기저귀 정도일 것이다. 조금 지나면 손가락 빨기와 아빠의 까꿍놀이가 추가된다. 아이는 커가며 아빠가 태워주는 비행기 놀이가 주던 것과 비슷한 쾌감의 절정을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며 경험한다.


이렇게 실재계의 쾌락은 점점 강해진다. 하지만 (1)편에서 배운 것처럼 실재계에는 쾌락과 고통이 함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강아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지만, 열 살 즈음 가장 친한 친구였던 강아지의 죽음은 원초적 장면(Primal Scene)급 트라우마를 아이에게 남길 수 있다. 즉 쾌락과 함께 고통 또한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1)편에서 우리가 상징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실재를 직접 접하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적절한 훈육의 과정을 통해 상징계를 형성해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러한 실재를 직접 접하며 살아가야 한다. 어느 나이까지는 실재계가 주는 쾌락도 고통도 견뎌낼 만한 수준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상징계가 없는 사람도 본능적으로 실재계를 방어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막아낸다는 말인가? 상징계가 없는데? 상징계가 없는 이들도 갖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 모두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세계다. 바로 우리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상상계다. 그래서 상징계가 없는 이들은 환각과 환청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이들이 바로 정신병자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시는 정신병자다. 그는 친구와 친구 딸의 환상을 경험한다. 그는 친구의 딸이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들이 환상임을 알아차린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우주인이 나를 납치해서 인체 실험을 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 그러니까 정신병자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생생한 환각을 경험한다. 실은 환각은 정신병자들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신경증자들도 환각을 가끔 경험한다. 정신병자와 신경증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신경증자들은 환각을 의심하고 정신병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 같은 신경증자들은 환각을 경험하면 눈을 비빈 다음 다시 본다. 의심하는 것이다.


또한 정신병자들은 소외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상징계의 규칙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는 정신병자로 분류되는데, 그들이 그토록 무자비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상징계의 규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가 회사를 다니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것 등에 대해 라캉은 그것이 상징계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상계를 이용해 평범한 사람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소외의 강을 건넜다. 그래서 일단 정신병을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신경증자가 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 다른 강을 건너야 한다. 그것은 분리의 강이다.


상징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규칙과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규칙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내가 아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훈육과 학교 교육을 통해 규칙을 배운다. 우리는 복종을 배운다. 우리는 우리에게 복종하는 사람을 만들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복종한다. 상징계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복종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라캉은 우리가 복종해야 하는 대상을 대타자(大他者, Other)라고 부른다.


상징적이지만 대표적인 대타자는 아버지다. 많은 집안에서 어머니는 포용적이고 아버지는 금지한다. 어머니는 용서하고 아버지는 나무란다. 이런 이미지, 금지하는 자의 이미지를 대타자는 가지고 있다. (즉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는 큰 언니가 대타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대타자의 법과 금지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타자는 통금시간을 정해주기도하고(여자애가 밤늦게 어딜 쏘다녀!) 고유의 규칙을 만들기도 하고(매주 일요일 아침은 가족 모두가 함께 먹는다) 나의 욕망을 제한하기도 한다(일곱 살이나 됐는데, 이제 엄마 젖 그만 좀 만져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대타자의 역할은 나의 욕망을 정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이게 무슨 뜻인가?


대통령이나 공주 같은, 전혀 이룰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꿈 이후 성장기에 가졌던 꿈이 있는가? 중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꿈을 적어 내라고 하면 어떤 목표를 세웠었나? 한번 생각해 보라. 그 꿈을 여러분에게 제공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여러분이 신경증자라면, 대개 그 꿈은 대타자가 제공했을 것이다. 즉 대타자는 우리가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 의사가, 변호사가, 고위 공무원이, 되기를 말이다. 대타자는 자신의 욕망을 우리가 욕망하기를 바란다. 자신과 같이 안락한 삶을, 혹은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 꿈을 대타자가 지정해 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마치 신탁처럼 대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인다. 어떤 아이의 꿈은 변호사인데, 그 아이는 자신이 변호사가 될 운명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성장을 하던 어느 날, 아이는 대타자에게서 균열을 발견한다. 대타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흰머리에서, 굽은 어깨에서, 실수했음을 사과하는 상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대타자의 불완전함을 발견한다. 아이는 어느 날,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사법고시에서 여덟 번이나 고배를 마시고, 변호사의 꿈을 접고 물류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나를 통해 이루고 싶어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아이는 비로소 대타자로부터 분리된다. 분리되었다고 해서 당장 규칙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늦어도 막차가 끊기기 전에 집에 들어갈 것이고, 늦잠 자는 동생을 깨워 일요일 아침을 가족들과 함께 먹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법대를 다니며 로스쿨 진학 준비도 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내가 친구들과 술을 먹다 먼저 일어서는 것, 일요일 아침에 토스트를 구워놓고 짜증 내는 남동생에게 일어나라며 이불을 걷어 채는 것, 변호사의 꿈을 여전히 간직하는 것은 아버지의 금지 때문이 아니다. 이 규칙들을 내가 따르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만, 그것은 대타자의 신탁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선택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분리의 과정이다. 이렇게 나는 대타자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사회화 과정, 소외와 분리의 과정을 라캉은 거세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아이는 실은 변호사가 아니라 가수가, 발레리나가, 기자나 요리사가 되고 싶었을 수도 있다)을 거세(포기)하고 대타자의 욕망을 스스로 받아들여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드디어 신경증자가 된다. 우리는 남들과 비슷한 꿈을 가지게 된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고 싶어 한다. 언젠가 큰돈이나 명예를 얻기를 바라며 소소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나보나 먼저 진급한 김대리를 부러워하고, 새로 차를 뽑았다는 동기의 SNS에 좋아요를 눌러준다. 이렇게 우리는 대타자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타자들의 욕망을 스스로 욕망하게 된다.


또한 평범한 일상이 지나가지만, 가끔 일탈도 하고 싶어진다. 갑자기 휴가를 내고 바다를 보러 가거나, 비싼 파인다이닝을 예약을 하고 기분을 내보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상징계의 규율을 따르지만, 내게 허락된 소확행도 꼭 챙기게 된다.


신경증자는 기본적으로 상징계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렇게 실재계의 쾌락을 즐기고, 고통과도 마주친다. 고통과 마주할 때 신경증자는 히스테리를 부린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대개 그 앞에서는 꾹 눌러 참다가도, 가끔 술자리에서 그 장면이 떠오르면 동료나 친구들 앞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김부장 개새끼를 외치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이 바로 평범한 신경증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리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앞서 소외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정신병자가 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라캉은 소외를 경험했으나 분리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도착증자가 된다고 말한다.


분리의 과정을 다시 말하면, 먼저 대타자에 의해 금지를 당하고(열 두 시까지는 들어와야 해), 그 금지를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분리에 실패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대타자에게서 분리되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대타자가 없는 경우다.


우선 금지를 살펴보자. 금지는 욕망을 만들어 낸다. 아기에게는 욕망(desire)이 없다. 아기는 그저 욕구(need)를 느끼면 요구(demand)할 뿐이다. 배가 고픈 욕구를 느끼면, 울어서 엄마의 젖을 요구한다. 아기의 요구는 언제나 적절하게 채워진다. 엄마는 배고프거나 응가를 한 아기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엄마의 젖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2개월이 되어 이유식이 시작되면 엄마는 따뜻한 엄마의 젖 대신 차가운 숟가락을 아기의 입에 집어넣는다. 엄마의 젖은 금지된다. 이제 아기는 엄마의 젖을 욕망(desire)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금지는 욕망을 만들어낸다.


신경증자인 우리는 상징계의 법을, 즉 대타자의 금지를 스스로 받아들였으므로 그 욕망을 참아낸다. 우리는 금지된 것을 참아낸다. 지하철에서 예쁜 여성을 발견해도 엉덩이를 만지지 않고, 이성이 용변을 보는 것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금지된 것을 금지된 채로 두는 것이다.


하지만 분리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도착증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금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금지된 것을 직접 욕망한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소외를 경험했기 때문에 도착증자들에게도 법은 설치되어 있다. 그들은 범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하철에서 여성의 엉덩이에 손을 대고, 범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한다.


이것이 라캉이 설명하는 관음증, 노출증, 페티시의 원리다. 상징계의 법에도 불구하고, 도착증자들은 늘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Marquis_de_sade.jpg 사디즘으로 알려진 사드 후작(1740~1814) 위키피디아 제공.


또 다른 형태의 도착증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다. 라캉은 대타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설명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상징계의 법과 규율은 있으나 그 집행자인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라는 것이다. 이 경우,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는 대타자 자체를 욕망하게 된다.


흔히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는 때리는 행위나 맞는 행위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오해되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체벌은 결과다. '너는 아주 질 나쁜 아이군. 너는 따끔한 맛을 봐야 해.', '네가 그것을 해선 안되었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이렇게 상징계의 규칙이 동작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규칙의 결과로 체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라캉학파 정신분석가 브루스 핑크는 거세를 완성하기 위해 거세의 무대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즉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금지의 주체, 법의 집행자인 대타자의 부재 때문에 발생한다. 사디즘은 도착증자 자신이 대타자의 역할을 수행하려 하는 것이고, 마조히즘은 누군가 타인이 대타자의 역할을 수행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타자가 존재함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것이라는 것이 라캉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대타자와의 분리를 경험할 수는 없다. 대타자를 욕망만 하는 이런 방식으로는 분리의 조건인 대타자의 균열을 발견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착증자들은 신경증자가 되지 못하고 평생 도착 행위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라캉 정신질환의 진단 과정의 절반 정도다.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거세의 과정을 거쳐 신경증자가 되는지, 거세를 거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신병자가, 도착증자가 되는지 살펴보았다. (3)편에서 우리는 강박증의 원리와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완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라캉을 깊게 읽은 분이 이 글을 본다면, 내가 구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라캉의 정신분석 과정에 대해 쓰면서 주이상스도, 대상 a도, 심지어 주체 개념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개념들이 필요 없기 때문에 제외한 것은 아니고, 내용을 최대한 쉽게 쓰면서 라캉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저 개념들을 생략했다는 말을 변명처럼 붙여 둔다.


이 글을 쓰느라 주말을 또 도서관에서 보냈다. 라캉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조금이나 도움이 되었길. 그리고 오늘 하루, 나도 당신도 건강한 신경증자로 살아가기를 바라본다.



https://brunch.co.kr/@iyooha/131

https://brunch.co.kr/brunchbook/like-fouc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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