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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5) 대상 a와 예술의 의미

욕망의 대상과 라캉의 예술론

by 이상균

이 글은 앞선 글들에서 이어지는 글이지만, 라캉의 삼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상태에서 대상 a(objet petit a)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검색 등으로 유입되셨다면 그냥 이 글을 읽으시면 됩니다. 라캉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은 앞선 글들을 처음부터 읽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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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라캉의 삼계와 주체 개념을 이용해 우리가 어떻게 소외와 분리의 과정을 거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평범한 신경증자가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환상을 가로질러 훌륭한 신경증자가 되는지 살펴보았다. 정신질환의 진단에 한해서는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된다.


하지만 나는 환상 횡단 그 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예술야 말로 보편적으로 추구할만한 개별 환상이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소재다. 마지막 편을 읽고 나면, 라캉이 말하는 예술의 진정한 의미, 정신분석 관점에서 예술의 원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이야기를 하려면 몇 개의 개념들을 통과해야 한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대상 a, 모든 대상이 거세되어 있다는 깨달음, 실재를 죽이는 도구로서의 언어 등이다. 아포리즘들이 무시무시한 것 알고 있다. 늘 그랬지만 내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다. 아래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기 전에, 라캉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1)편을 다시 읽고 오시기를 권한다. (1)편에서 이야기했던 상징계와 실재, 언어 개념들이 다시 등장할 것이다.




라캉은 욕망을 '요구에서 욕구를 뺀 것'이라고 정의한다. 아기는 배가 고프면 운다. 기저귀가 축축해도 운다. 졸려도 운다. (아기를 키워본 적 없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면, 아기는 '졸리다'는 기분을 모르므로 '졸리다'를 평소와, 그러니까 안락한 상태와 다른 무엇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졸린 상태를 불편해한다. 그래서 운다) 아기는 욕구를 느낄 때마다 울어서 요구한다. 엄마는 그 요구를 적절하게 채워준다. 배가 고파 울면 젖을 주고, 기저귀가 축축해서 울면 보송한 새 기저귀로 갈아주고, 졸린 것 같으면 안아서 토닥토닥 재워준다. 아이의 요구는 엄마에 의해 채워진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먹는다. 변의를 느끼면 화장실에 간다. 피로를 느끼면 잠자리에 든다. 우리는 성인이므로 엄마에게 요구하지는 않지만, 욕구를 느끼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요구한다. 먹어라, 화장실을 찾아라, 잠자리에 들어라, 이렇게 말이다. 이와 같이 요구는 욕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당신은 왜 에르메스 백을 욕망하는가? 당신은 왜 포르쉐를 욕망하는가? 당신은 왜 더 좋은 대학을, 더 많은 연봉을, 더 높은 직급을 욕망하는가?


욕망은 욕구를 전제로 하지 않는 요구다. 우리는 (2)편에서 우리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2)편에서 이미 보았지만, 우리는 대타자와 상징계의 명령에 따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즉 욕망은 욕구가 아니라 대타자와 상징계의 명령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이유다. 그토록 열망하던 포르쉐를 결국 가지고 나면 이제는 페라리가 보이고, 고과를 열심히 챙겨 과장이 된 다음엔 차장이 되고 싶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국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면 눈앞에 좋아하는 햄버거가 있어도 더 먹고 싶지는 않다. 반면 욕망하던 에르메스 백을 가진 후에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요구를 발생시킨 욕구는 채울 수 있지만 욕망을 발생시킨 대타자와 상징계의 명령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대상. 대타자와 상징계의 명령이 발생시킨 이 대상. 영원히 채울 수 없지만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갈구할 수밖에 없는 이 대상을 라캉은 대상 a(objet pepit a)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대상 a의 본질은 무엇일까?


대상 a의 가장 큰 특징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달성 불가능성에 있다. 우리는 대상 a를 달성할 수 없다. 대상 a를 달성하면 욕망은 채워질 것이다. 욕망은 채울 수 없으므로 대상 a 역시 달성할 수 없어야 한다.


또 다른 특징은 대상 a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상 a는 처음부터 한 번도 우리에게 속한 적이 없었다. 만약 대상 a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 혹은 누군가가 빼앗아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찾아내거나 탈환해 오는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 a는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누군가가 빼앗아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상 a는 무엇일까? 영원히 달성할 수 없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빼앗아간 것도 아니라면 대상 a는 대체 무엇일까?


대상 a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어렵다면 반대로 대상 a가 아닌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위에서 그것이 대상 a인 줄 알았지만 실은 아니었던 것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를 들어 에르메스 백과 포르쉐, 이런 것들은 대상 a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걸 가져도 욕망은 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대상 a가 될 수 없다.


또한 세상에 있는 비물질적인 것들도 대상 a가 될 수 없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우리는 과장이 된 후에는 차장을 욕망한다. 그러니까 직급, 연봉, 사회적 지위, 명예와 같은 것들도 대상 a는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조금 더 논의를 확장해 보자. 삼성전자는 어떤가? 삼성전자를 소유하면 욕망은 달성이 될 것인가? 대한민국은 어떤가. 당신이 대한민국을 소유하게 된다면(그게 어떠한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의 욕망은 달성이 될 것인가?


만약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면 당신은 놀라운 것을 이미 놀라운 것을 하나 깨달았을 것이다. 위에서 우리가 든 모든 예, 에르메스 백과, 차장 직급과, 삼성전자와, 대한민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그렇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1)편에서 얘기했던 상징계의 대상들이다. 우리는 비로소 상징계의 그 어떤 대상들로도 우리의 욕망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상징계의 모든 대상은 대상 a가 아닌 것이다.


그 어떤 상징계의 대상들로도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달성할 수 없으며, 그 어떤 대상도 대상 a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켜 라캉은 모든 대상은 거세된 대상이다라고 말한다.




라캉에 의하면 그저 환상일 뿐인 평범한 상징계를 살아가는 우리 신경증자들, 그러니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평범한 우리는 평소에는 이러한 생각들을 별로 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세상이 살라고 하는 대로 산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늦지 않게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도착해서, 회의를 하고, 자료를 만들고, 부장님에게 꾸중을 듣고, 퇴근해 TV 앞에서 조촐한 저녁에 곁들여 맥주 한 캔을 마신 후 잠에 든다. 에르메스 백은 엄두를 못 내지만 미우미우 지갑 정도는 돌아오는 생일에 하나 사볼까 싶다. 우리는 이렇게 기꺼이 환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대개는 상징계 바깥의 세상에 별로 관심이 없다. 평범한 신경증자들은 상징계 바깥을 굳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거세된 대상을 우리의 대상 삼으며 살아간다. (4)편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환상을 가로지르는 방법이 있다는 걸 깨닫기는커녕,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환상임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상징계 바깥을 탐닉하려는 자들이 있다. (2)편과 (3)편에서 우리는 소외와 분리를 겪으며 상징계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했다. 상징계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상징계를 너무 완벽하게 받아들이면 강박증자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즉 우리 평범한 신경증자들은 상징계가 실재계를 거의 다 덮고 있지만, 완벽하게 덮지는 못해 상징계에 뚫린 구멍을 통해 실재계를 곁눈질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 곁눈질이 히스테리로 돌아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과정을 우리는 (3)편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상징계에 난 구멍이 너무 큰 사람들이 있다. 상징계를 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상징계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상상계에 남은 정신병자들과, 소외를 경험했지만 거세를 이루지 못한 도착증자들과는 달리 일단 상징계로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우리 신경증자들이 되지 못한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곁눈질을 하지 않는다. 구멍이 너무 크기에 그들은 아직 상징계로 덮지 못한 실재계를 직접 본다. 그들은 엄청난 에너지와 쾌락, 죽음의 고통과 공포가 함께 있는 실재의 세계가 상징계의 뒤편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들은 환상으로서의 일상을 살아가는데 만족하지 않고, 상징계의 바깥을 향해 늘 손을 뻗으려 한다. 우리 신경증자들이라면 평소에 도무지 관심 갖지 않을 것들을 늘 갈구하고 향유하려고 하는 이들인 것이다.


눈치를 챘는가? 그렇다. 그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예술가들은 상징계에 뚫린 구멍이 크다. 상징계에 구멍이 전혀 없는 강박증자들은 실재계를 전혀 탐닉할 수 없고, 상징계에 구멍이 조금 뚫린 우리 신경증자들을 일탈적으로 실재를 경험하지만(다이어트를 하다 말고 족발을 시키고, 출근을 하다 말고 속초행 티켓을 사지만) 구멍이 너무 크게 뚫린 예술가들은 일상 속에서 실재를 본다.


IMG_0137.jpeg ⓒ 꽃집 청년들


우리 평범한 신경증자들은 이러한 꽃다발을 보면 이 꽃다발을 거세된 대상으로 분해한다. 이 꽃다발은 수국과 장미 외 리본 등 부재료 등으로 되어 있고, 가격은 10만 원이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그런 식으로 꽃다발을 보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분할된 개별 꽃이 아니라, 꽃다발 전체가 풍기는 어떤 뉘앙스가 발생시키는 감흥을 이용하여 고흐의 <별 헤는 밤>을 떠올린다. 예술가의 예술적 감흥이 꽃다발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그의 감성을 다른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예술가가 꽃다발과 <별 헤는 밤>을 겹쳐 놓은 결과로 비로소 우리는 예술가가 닿으려 했던 그 무엇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예술가가 꽃다발 너머에서 보았던 어떤 대상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낀다. (그 대상은 <별 헤는 밤>이 아니다. 오히려 <별 헤는 밤>에 도달하게 한 무엇이다.)


그 대상, 그러니까 예술가가 꽃다발 너머에서 보았고, 꽃다발에서 도약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별 헤는 밤>에 닿게 한, 그것. 우리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예술가는 발견해 냈고, 희구하였으며, 그것을 쫓아갔으며, 직접 닿지는 못했지만 결국 <별 헤는 밤>에는 닿게 했던 그것, 그 대상은 무엇일까? 상징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실재계를 직접 탐닉하려 하는 예술가는 볼 수 있었던 그대상은 무엇일까?


그렇다. 그 대상이 바로 대상 a다.




코타키나발루의 석양. ⓒ citytour.com


(1)편에서 한번 한 얘기지만 언어와 실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겠다. (이전에 읽었던 분은 이 부분은 넘어가셔도 된다)


당신이 코타키나발루의 거대한 석양 앞에 서 있다고 하자. 그때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가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이 어떻냐고 말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봐."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감동한 건 처음이야"라고 할 것인가? 어느 쪽 대답이든, 그 대답은 당신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을 뿐, 그 장대한 석양의 본질을 담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언어로는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실제로 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 세계는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위의 꽃다발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무엇이 예술가를 꽃다발에서 <별 헤는 밤>으로 도약시켰는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꽃다발과 <별 헤는 밤>을 겹쳐 놓았을 때 느껴졌던 어떤 철렁한 감흥, 마음이 흔들했었던 그 어떤 느낌을 언어로 옮길 수 있겠는가?


만약 그 느낌을 언어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 언어에 예술가가 느꼈던, 혹은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우리가 느꼈던 그 느낌이 담기겠는가?


불가능할 것이다. 언어는 실재를 기술할 수 없다. 언어는 철저히 상징계에 속해있다. 오히려 언어로 실재를 묘사하면 그 실재의 본질은 사라진다. 그래서 라캉은 언어는 실재를 죽이는 도구라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상징계의 바깥에 있는 대상 a를 본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가져오려고 한다.


하지만 예술가가 가져오려는 대상 a는 상징계가 아니라 실재계에 있다. 그런데 위에서 언어는 철저히 상징계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대상 a를 언어로 바로 가져오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상 a가 실재계에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하지만 대상 a와 예술의 구도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오해하도록 하자. 아래에서 이 오해를 다시 풀 것이다.)


언어로 세계, 혹은 실재를 직접 기술할 수 없기 때문에 시인과 소설가는 은유를 사용한다. 시인은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쓴다. 마음이 호수인가? 마음과 호수는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같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어떤 기분, 정확히는 예술적 감흥을 느낀다. 호수가 가진 어떤 속성, 그러니까 고요함, 잔잔함, 맑음, 그윽함, 고상함 등을 가진 시인의 마음을 상상하고 그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IMG_2877.jpeg 모네의 <루앙 성당> 연작.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일본의 오츠카 미술관에 전시된 재현작(reproduction)이다.


하지만 어떤 예술가들은 은유와 같은 간접적인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상 a에 닿으려 한다. 인상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인 클로드 모네는 루앙 성당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매일 성당을 그렸다. 맑은 날에도 그리고, 비 오는 날에도 그리고. 아침에도 그리고, 저녁에도 그렸다. 그러다 보니 이십여 점의 이 연작은 같은 성당을 그렸지만 비슷한 작품이 하나도 없다.


모네는 아마도 빛이 만들어내는 신묘한 변화 속에서 대상 a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잡아내려, 그러니까 그려내려 했다. 루앙 성당을 이십여 번이나 그리면서 빛이 만들어내는 변화와 신비로움,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도 늘 건재한 성당의 아름다움까지 잡아내려 했다.


우리 평범한 신경증자들은 예술의 대상 속에서 대상 a를 발견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늘 거세된 대상들 사이에서 그것들과 교류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거세된 대상인 에르메스 백이나, 또 다른 거세된 대상인 포르쉐를 대상 a인 줄로 믿고 그것들을 욕망한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그렇지 않다. 평범한 우리와는 달리, 예술가들은 그것들이 모두 거세된 것들임을 안다. 모네가 빛 속에서 대상 a를 발견하듯, 예술가들은 전혀 다른 대상 속에서 이렇게 대상 a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예술의 정체다. 예술은 실재에 대한 희구인 것이다. 평범한 이들은 발견해 낼 수 없는 대상 속의 대상 a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욕망한 나머지 작품으로 옮겨 소유해 보려는 시도. 이것이 바로 예술이며, 그 결과물이 예술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시도는 성공할 것인가? 예술가는 대상 a를 자신의 화폭에 옮기는 데 성공할 것인가? 예술가는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대상 a의 획득이 가능했다면 예술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햄버거를 먹어서 배고픔을 지우는 방식으로 대상 a를 획득해서 예술을 지울 수는 없다.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는 예술가를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최고작을 만들었으니 이제 예술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예술가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에르메스 백이나 포르쉐를 소유해도 욕망이 달성되지 않는 것처럼, 예술가의 욕망도 영원히 달성되지 않는다. 예술가는 희구하는 실재를 결코 자신의 작품에 온전히 잡아 올 수 없다. 예술은 실재에 대한 희구이지만, 이처럼 모든 예술은 늘 실패할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1)편 서두에서 언급했던 아포리즘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술가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예술가가 포착한 대상 속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거기에 남는다. 결코 예술가는 그것을 작품으로 가져올 수가 없다. '거기'란 바로 실재계이고, '거기에 남는 것'이 바로 대상 a다.




정말 길었던 글이 끝났다. 대상 a와 예술의 의미에 대한 글은 물론이고, 다섯 편으로 이어진 라캉 시리즈 전체가 끝났다. 내가 라캉에 대해서 정리하고 싶었던 내용은 이것으로 모두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대상 a와 예술의 구도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고의로 만들었던 오해를 해소하고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이해편의상 이번 (5)편에서는 대상 a가 실재계에만 있는 것처럼 기술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대상 a는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에 모두 걸쳐있다. 실은 라캉의 삼계 어디에서나 대상 a를 발견할 수 있다.


상상계의 대상 a는 어머니 그 자체다. 아기는 엄마를 욕망한다. 아기는 엄마가 배가 고프면 젖을 주고, 기저귀가 축축해지면 갈아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아기는 엄마가 자신 그 자체이길 바란다. 아기는 엄마가 24시간 자신의 바로 옆에서 늘 자신의 욕구를 해소해 주고, 자신의 쾌락을 지속시켜 주기를 바란다. (실제로 아기는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무한한 쾌락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욕망처럼, 아기의 욕망도 달성되지 않는다. 엄마도 인간적 개체이므로 어머니에게도 생활이 있다. 엄마도 밥을 먹을 시간이 필요하고, 엄마도 잠잘 시간이 필요하며, 엄마도 숏츠를 볼 시간이 필요하다. 이 요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즉 엄마는 아기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첫 번째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상징계의 대상 a는 (4)편에서 증상을 경험하게 하는 원인이다. 바랬던 회사에 원서를 냈지만 서류에서 떨어졌던 날, K군은 영어 학원에 가지 않고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K군은 그 순간 영어 학원에 가지 않는 대신 친구와 술을 한잔 하면 무엇인가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 기분은 위로일 수도, 다시 일어설 용기일 수도, 그냥 슬픔과 좌절에 푹 빠져버리고 싶은 욕망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상 a다.


사업부장님 따라 매주 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다니더니 이번 인사에서 과장으로 승진한 박대리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술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안 알아주고 골프 치는 새끼나 승진시키는 병신 같은 회사! 하고 외쳐버린 김대리. 김대리가 참지 못하고 폭발한 순간, 그 말을 외치는 순간 무엇인가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그 말을 외쳤을 것이다. 역시 그것도 대상 a다.


나는 대상 a를 상징계에 뚫린 구멍 그 자체라고 하는 홍익대 장용순 교수님의 해석을 참 좋아한다. 우리 신경증자들의 상징계에는 이미 여러 차례 말했듯 구멍이 나 있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우리는 실재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받는다. (그 구멍으로 들어오는 실재를 탐닉해 보려는 시도가 히스테리라는 얘기를 이미 (2), (3), (4)편에서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실재계를 탐닉해도 그 구멍 자체는 획득할 수 없다. 꿀단지에 구멍이 났다고 생각해 보라. 구멍으로 꿀이 새어 나오고 있다. 우리는 그 꿀을 핥아먹으며 향락을 즐길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 구멍이 꿀을 제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구멍 그 자체는 획득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대상 a다.




예전에 다원예술공연 <여섯 개의 불가능>을 보고 <예술의 불가능>이라는 감상문을 쓴 적이 있다. 실은 이 감상문의 내용이 이 글, 라캉 (5)편의 내용과 거의 같다.


혹시 <예술의 불가능>을 보고 이해가 안 되셨던 분이 있다면, 지금 다시 보면 내용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경험을 하실 것이다. 아래에 감상문을 링크한다. 이제 이 긴 글을 마친다.


https://brunch.co.kr/@iyooh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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