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1월 3일, 니체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거리로 산책을 나섰다. 비가 온 후 갠 날씨였던지 길바닥은 온통 진흙투성이였는데, 니체는 진창에 빠진 채 누워서 허우적거리는 말을 발견한다. 마부는 화가 났는지 일어서지 못하는 말을 향해 계속해서 채찍을 내려치고 있었다. 말은 채찍을 얹어 맞을 때마다 히힝거리며 울고, 그때마다 마부는 더욱 화가 나서 말을 때렸지만, 말은 끝끝내 진창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 순간 니체는 갑자기 마차를 향해 뛰어들었다. 니체는 말의 목을 끌어 앉고 목을 놓아 울었다. 사람들이 니체를 보고 놀라는 사이, 니체는 정신을 잃는다. 사람들이 니체를 집으로 데려왔지만 니체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니체는 이후 과대망상 증세와 정신발작 증세를 반복하다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니체는 죽고 나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니체의 저서들에 국제적인 관심이 쏟아지자 니체의 동생이었던 엘리자베스 니체는 니체의 유고와 저작 출판권을 장악했다. 엘리자베스는 니체와는 달리 매우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오빠의 저서들을 곡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남긴 방대한 양의 유고들을 조합, 편집해서 니체의 사상이 독일민족주의적으로 보이도록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라는 저서를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세를 불리기 시작한 나치에게 이 왜곡된 니체의 사상이 포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니체는 나치의 선전도구가 되었다.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 '강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한다'와 같은 니체를 연상시키는 문구를 넣었고, 괴벨스는 '약자를 배제하는 강한 인간'을 연설문에서 언급한다. 히틀러는 엘리자베스를 후원했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묘소에 헌화했다. (최근 프린스턴 대학교 등의 연구에서, 엘리자베스는 희생자였을 뿐이고 니체를 의도적으로 곡해한 것은 나치 본인들이었다는 논문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니체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사후 50년이 넘게 곡해된 채 알려져 왔었다. 1960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미셸 푸코, 발터 카우프만 등이 니체를 다시 발굴하기 위해 원본 문서와 출판본을 대조하며 깊게 연구했고, 그 결과 현재의 니체가 복원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곡해된 니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오해는 현대에까지 살아남았다. 여전히 니체가 나치 부역자이며, 니체의 철학이 전체주의와 차별주의를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니체를 얕게 읽고 오해한 사람은 물론, 심지어 책을 꽤나 읽었다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번 달 트레바리 독서 모임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의 주제책은 이진우 교수님의 니체 입문서 <니체의 인생강의>다. 이 책은 훌륭한 니체 입문서이지만, 이 책 역시 잘못 읽으면 이 오해에 빠질 수 있게 쓰인 부분이 있어 멤버들에게 보충 자료로 주려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니체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를 소개하고, 그것이 왜 오해인지, 니체가 실제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지 쉽게 써보려고 한다.
* 이진우 교수님은 주제책에서 '권력에의 의지'라고 쓰셨지만, 나는 이 글에서는 좀 더 널리 알려진 '힘에의 의지' 번역어를 쓰겠다.
니체의 중요 철학소인 '힘에의 의지'는 실제로 힘을 향한 의지, 혹은 힘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 혹은 '타인을 굴복시키려는 충동' 등으로 오해한다. 나치는 이 개념을 우월한 아리안이 열등한 유대인들을 억압하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사용했다.
하지만 니체의 '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니체의 힘은 오히려 양자역학적인 것이다. 질량을 가진 입자들 사이에 중력이 작용하듯, 전하를 가진 입자들 사이에 전자기력이 작용하듯, 양성자와 중성자 사이에 강한 핵력이 작용하듯, 모든 쿼크와 렙톤들 사이에 약한 핵력이 작용하듯, 그렇게 힘은 모든 곳에 있다. 이 우주 전체는 힘으로 가득한 것이다.
즉 니체에게 힘은 당연한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생명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 돌조차 땅으로 떨어지려는 중력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너는 왜 주어진 대로 삶을 사는가?', 이것이 힘에의 의지다. 니체가 보기에 다윈적 생존 본능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것에 불과하다. 니체는 생명이라면 항상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 성장하고 확장하고 창조하는 자기 극복에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너 자신을 극복하라'는 자기 계발적 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힘에의 의지는 존재론이 된다. 예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인 순간, 카텔란이 덕트 테이프로 바나나를 전시실 벽에 고정한 후 '코미디언'이라고 명명한 순간(정확히는 카텔란 본인이 붙인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작용한 힘에의 의지는 변기를, 바나나를 예술로 만들었다.
이렇게 힘에의 의지는 결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제압과 굴복, 착취와 같은 단선 구조에 머물지 않는다. 생명은 물론 우리 삶의 다양한 층위들, 그러니까 예술, 철학, 도덕등에 이미 힘에의 의지가 스며들어 있고, 우리의 외부뿐만이 아니라 내면에서도 수많은 충돌과 역동을 이루며 변화와 발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힘에의 의지는 '타인을 굴복시키거나 착취하라'는 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 이야기를 해보자. 나치가 왜곡한, 독일민족주의적 힘에의 의지는 그렇다면 힘에의 의지가 아닌가? 그것은 힘에의 의지 바깥에 있는가? 유대인을 탄압하고 유럽을 전쟁의 화마 속으로 몰아간 것은 힘에의 의지가 아닌 것인가?
박찬국 교수님은 힘에의 의지 그 자체에는 선과 악이 없다고 말하신다. 예술품에 가까운 일본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의 회칼이 야쿠자의 손에 들어가면 범죄 도구가 되듯, 힘에의 의지 자체에는 선과 악이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서는 고귀할 수도, 위선적이거나 비겁한 힘에의 의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수많은 악행들 역시 이미 힘에의 의지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닐 뿐이다.
힘에의 의지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면 이제 대부분 해결이 됐을 것이다. 이제 이 보다 더 큰 오해를 받는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에 대해 얘기해 보자.
니체의 또 다른 철학소 중 하나는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이다. 먼저 니체가 설명하는 이 개념에 대해서 짧게 살펴보고, 이 개념을 어떻게 오해하는지 얘기하겠다. 이 개념은 주로 <도덕의 계보>와 <선악의 저편>에 등장한다.
주인 도덕은 강하고 능동적인 사람들, 즉 주인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만든 도덕이다. 이 도덕에서 선(good) 한 것은 적극적인 삶의 힘, 창조성, 자신감, 자기 긍정, 용기, 명예, 힘, 고귀함 같은 것들이고, 이 도덕에서 악(evil) 한 것은 나약함, 비겁함, 자기부정, 용기를 내지 못함, 비열함, 소심함, 패배주의 같은 것들이다. 주인 도덕의 가치 평가 기준은 주인 자신이다. 주인에게는 타인이 필요 없다. 주인은 타인에 대한 질투나 시기, 원망 등의 감정 때문에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노예 도덕은 약하고 수동적인 사람들, 즉 노예들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강자에 대한 집단적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으로부터 출발하여 만든 도덕이다. 이 도덕에서 선한 것은 겸손, 인내, 순종, 동정, 평등, 검소함 같은 것들이다. 반면 이 도덕에서 악한 것은 과시, 반박, 반발, 냉혈함, 탐욕, 우월감 같은 것들이다.
보다시피 노예 도덕의 가치는 주인이나 노예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이미 썼지만 주인 도덕의 가치인 힘, 창조성, 용기 같은 것들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예 도덕의 가치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타인을 필요로 한다. 겸손하고자 해도, 순종하고자 해도, 동정을 하려 해도 대상으로서의 누군가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과시하려고 해도, 누군가에게 반발하고자 해도, 누군가에게 우월감을 느끼려 해도, 대상이 필요하다.
니체는 도덕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유럽에서는 계속하여 노예 도덕이 승리해 왔다고 말한다. 기독교 도덕과 그에 영향을 받은 서구 전통이 약자의 특징(겸손, 인내, 순종, 동정)을 선으로 규정하는 도덕 체계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약자들이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자, 여기까지 얘기하고 입을 다물면 쉽게 니체를 오해할 수 있다. 니체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바로 '강자를 옹호하는 철학', 혹은 '약자를 경멸하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의 구도를, 주인 도덕이 계속해서 노예 도덕에 패배해 왔으니, 이제라도 주인 도덕의 가치인 힘, 창조성, 용기 등을 긍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약자를 폭력으로 침탈하여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해한다. (나치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주인 도덕을 활용한 셈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니체를 읽고 나서 가장 많이 하는 오해는 이러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은 있잖아요? 그들 더러는 어떻게 하라는 얘기죠? 모두가 주인이, 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면 당신은 니체를 오해한 것이다. 이제 이 오해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
이 오해에는 '강자=주인, 약자=노예'라는 단순한 사회적 해석이 깔려 있다. 즉 왕, 귀족, 엘리트가 곧 주인이고, 그들의 지배를 받는 평민이나, 혹은 사회적 패자, 장애인 등이 노예라는 해석이다. 이 구도에 놓으면 정확히 주인은 선의 자리에, 노예는 악의 자리에 놓이며, 당연하게 니체를 오해하게 된다. 니체는 엘리트주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니체가 말하는 주인과 노예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주인은 적극적인 삶의 힘, 창조성, 자신감, 자기 긍정, 용기, 명예, 힘, 고귀함 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창조해 가는 사람이다. 반대로 겸손, 인내, 순종, 동정, 평등, 검소함 등을 가지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학문적으로는 다소 엄밀하지 않겠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보겠다.
당신은 새 차를 몰고 출근하다가 주차장에서 동료를 만났다. 동료가 부러운 듯 당신과 차를 번갈아 바라본다. "와, 차 바꾸셨어요? 부자셨군요?" 당신은 또래 중에선 그래도 모아 둔 돈이 좀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겸언쩍은 표정을 지으며 겸손하게 대답한다. "뭘요, 할부예요."
사무실에 도착하니 9시부터 부장님이 주최하시는 반기 보고 준비 회의가 있다. 꼼짝없이 회의실에 갇혀 당신은 3시간을 버텨야 한다. 당신은 3시간을 인내한다. "김대리는 데이터 다시 정리해서 다음 주까지 갖고 와.", 이사님 마음에 들도록 데이터를 다시 써오라는 부장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순종한다. "알겠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이번에 정사원 채용이 안되어서 회사를 떠난다는 계약직 사원이 인사를 한다며 찾아왔다. 한편으로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지만 내 자리는 아직 안전하다는 생각에 안도한다.
오후에는 이번 분기 보너스 소식이 회사 게시판에 떴다. 전사원에게 월급의 150%가 지급된다고 한다. 대리의 150%와 부장의 150%가 같진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평등하다니 이만하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문득 새로 나온 아이패드를 검색하다가 브라우저를 닫는다. 차 할부를 아직 석 달 밖에 넣지 않았다. 당분간은 검소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이 오는가? 그렇다. 사실은 우리 모두 노예 도덕에 갇혀 있다. 니체가 말하는 약자는 장애인이나 사회 부적응자들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노예는 주어진 방식 그대로 그 삶을 살아가는 바로 우리다. 기독교적 질서가 자본주의적 질서로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노예의 방식대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주인은 어떠한 사람인가? 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말한다. 주인은 위험하게 산다. 주인은 주어진 삶의 방식에 관심이 없다. 위에서 주인의 도덕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힘을 가지고, 진취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주인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관심조차 갖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주인은 부자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https://youtu.be/F4HPOWRmGIg?si=yRio13HSAi7OSEHU
여기까지, 니체를 읽고 나서 얻는 흔한 오해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설명하고 싶은 것들이 더 많다. 주인과 노예 구도에 대해 한 단계 더 깊게 얘기하자면 사실 니체는 선과 악의 개념 자체가 누군가에 의해 목적성을 갖고 발명된 것이며, 주인과 노예 구도는 기존의 철학과 도덕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항대립적인 것으로, 이 구도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생각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계승한다) 실은 이런 이야기들이 더 중요한 얘기다. 하지만 이러한 얘기는 독서모임 자료로 쓰겠다는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서 언급하지는 못했다. 나머지 얘기들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한다.
점심 먹고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와인을 딸 시간이다. 이 글에 일요일 오후가 통째로 다 들어갔다. 독서모임은 여전히 재미있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가끔은 내 꾀에 내가 스스로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이왕 니체에 대해 썼으니, 이후 니체의 초기작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대한 글을 이어서 몇 편 써볼까 한다. 관심 있는 분이 있다면 이후 살펴봐 주시면 좋겠다. 긴 글을 마친다.
https://brunch.co.kr/@iyooha/81
https://brunch.co.kr/@iyooha/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