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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3) 선악의 탄생

<도덕의 계보> 1 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by 이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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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니체의 핵심 저서인 <도덕의 계보>를 다시 읽고 정리를 한번 해봐야겠다 싶었는데, 최근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을 읽고 영감을 좀 얻기도 했고, 다다음달에 독서모임 [보탬] 시즌과 시즌 사이 인터루드 주제가 <도덕의 계보>여서 지금이 정리하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는 주목적은 [보탬] 멤버들에게 참고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의의 수준이 다양하거나 깊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책에 담긴 핵심적인 정수를 논문마다 딱 하나씩만 뽑아 쉽게 정리하고, 우리의 삶에 비추면 어떠한 모습이 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볼 것이다. (학술적으로는 다소 엄밀하지 않을 예정이다)




니체는 보통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대표 저작이라기보다는 니체 철학을 종합하여 승화한 운문 형식 장편 소설에 가깝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니체를 여러 권 읽지 않으면, 이 책은 사실 거의 읽히지 않을 것이다. (주석에 의지하여 읽어내는 방법은 있겠지만, 아마 재미있는 작업은 아닐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사상을 다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이 책을 썼는데, 안타깝게도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크게 상심한 니체는 니체 답지 않게(?) 자신의 작품을 성찰하는데, 그는 생각 끝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너무 잠언적이고 상징적이고 패러디적이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안 팔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보다 훨씬 쉽게 자신의 사상을 설명한 책을 저술하기로 하는 데, 그것이 <선악의 저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악의 저편> 역시 많이 팔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니체는 사실, 재직했던 당시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출간해 준 <비극의 탄생>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책을 자비 출판했다. 그러니 실망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역시 굴하지 않고 <선악의 저편>에서 다루었던 여러 주제 중 ‘도덕’ 부분을 확대, 상세 해석한 책을 쓰는데 그 책이 바로 이 <도덕의 계보>다.


도덕의 계보라니, 제목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제목이 무시무시하게 생겼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니체가 책 제목을 참 잘 짓는다고 생각한다. 제목에서 니체는, 내가 이 책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계보학은 출발점에 대한 연구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계보는 족보다. 나의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그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그 아버지는 누구와 결혼하여 누구를 낳았는지. 즉 나는 누구로부터 기인했는지 찾아볼 수 있게 하여 나의 출발점을 탐색하는 문서가 족보다.


이렇게 계보학은 어떠한 사물이나 담론이 근본적으로는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관심을 갖는다. 그럼 이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니체는 제목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덕이 무엇으로부터 기원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알아보겠다”, 이 책은 이런 책인 것이다.


역시나 서두가 길었다. 이 책은 세 개의 논문으로 되어 있다. 나는 논문 하나당 한편씩, 세편의 글을 쓸 것이다. 오늘 쓸 글은 첫 번째 논문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에 대한 글이다.




영어 good 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좋다'는 뜻이고, 하나는 '선하다'는 뜻이다. 좋다와 선하다는 다른가? 다르다. 명품백은 '좋은' 것이지만 '선한' 것은 아니다. 전자 측면에서 good의 반대말은 bad(나쁜)이고, 후자 측면에서 good의 반대말은 evil(사악한)이다.


이런 현상은 라틴어 계열 거의 모든 언어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독일어 gut은 '좋다'와 '선하다' 양쪽의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영어와 마찬가지로 독일어에서 gut의 반대말도 schlecht(나쁜)과 böse(사악한)으로 두 개다.


우리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한국어를, 그러니까 라틴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명백하게 '좋다'와 '선하다'를 구분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 지점에서 의문을 갖는다. 왜 이런 현상이 다른 어족 언어에는 없는데, 라틴어 계열 언어에는 늘 나타나는가? (별게 다 궁금하다 싶지만, 원래 별 것 아닌 질문에서 놀라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철학의 재미다)


니체는 이 세 개의 단어에 계보학적으로 접근한다. 500년 전에는 good, bad, evil 이 각각 어떤 뜻으로 쓰였을까? 1000년 전에는? 1500년 전에는? 2000년 전에는?


니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서들을 파헤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과거에는 good의 두 번째 반대말인 evil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good은 단지 한 개의 뜻한 가지고 있었다. '좋다'이다. good에 '선하다'는 뜻이 부여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니체는 본문에 이렇게 쓴다.


모든 언어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근본 개념에 해당하고, 이것이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품 있는',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의 '좋음'으로 필연적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발전은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을 마침내 '나쁨 [저열함]'이라는 개념으로 이행하게 하는 다른 의미 발전과 항상 평행하여 진행된다.

'schlecht(나쁜)'라는 독일어를 보라. 이것은 schlicht(소박한)과 동일한 말이며, schlehtweg(단지), schlechterdings(단순히)도 같은 어원을 따른다. 이 단어는 아무런 비난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은 채 그저 귀족과 대립하는 자, 즉 평민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는 오늘날 의미가 바뀌게 되었다.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악(evil)의 개념은 어쩌다 생겨나게 된 것일까? 니체가 도달하는 결론은 놀랍다. 이제 따라가 보자.




고대에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있었을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 혹은 그러한 구도는 전 세계 수많은 민족과 국가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미국은 1865년에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중동의 국가들은 1960년대까지도 노예제를 유지했다.


스파르타쿠스도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검투 노예가 됐다. ⓒStarz


주인과 노예는 언제부터 주인과 노예였을까? 주인과 노예가 태어날 때 결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대개는 전쟁 등의 정복 행위가 먼저 있고, 패자가 죽음 대신 노예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주인과 노예가 생겨났을 것이다. 주인과 노예 사이에는 강자와 약자 사이의 지배와 굴종이 처음부터 있었다.


일단 주인과 노예가 결정되고 나면 그 후엔 주인과 노예가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인은 더 좋은(good)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었을 것이고, 노예는 주인의 것에 미치지 못하는, 질 나쁜(bad) 옷을 입고 질 나쁜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생각하는 '좋음'과 '나쁨'의 시작이다. 주인에게 속한 것은 좋은 것이고, 노예에게 속한 것은 나쁜 것이다. 주인의 음식, 주인의 옷, 주인의 집, 주인의 자신감 있는 말, 주인의 충분한 소비 행태, 주인의 진취성 같은 것들은 모두 좋은 것들이 되었다. 반대로 노예의 음식, 노예의 옷, 노예의 집, 노예의 피동적인 말씨, 노예의 부족한 소비 행태, 노예의 예속성 같은 것들은 모두 나쁜 것들이 되었다.


하지만 온통 나쁜 것들로만 되어 있는 세계를 노예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노예는 상황을 역전시킨다. 노예에게 있는 것들을 좋은 것들로 바꾸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노예의 음식과 옷과 노예의 음식, 노예의 집은 나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이다. 노예의 피동적인 말씨는 나쁜 것이 아니라 겸손한 것이다. 노예의 부족한 소비 행태는 나쁜 것이 아니라 검소한 것이다. 노예에게 필연적인 주인에의 예속성은 나쁜 것이 아니라 순종적인 것이다.


노예는 상황을 역전시킬 뿐이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과 주인, 즉 강자와의 구도를 전복한다. 노예의 옷과 음식이 소박한 것이라면, 주인의 옷과 음식은 탐욕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노예의 말투가 겸손한 것이라면 주인의 말투는 젠체하는 과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노예의 소비가 검소한 것이라면 주인의 소비는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노예의 태도가 순종적인 것이라면 주인의 태도는 우월감을 뽐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선과 악이 탄생한다. 소박하고, 겸손하고, 검소하고, 순종적인 선과, 탐욕스럽고, 과시적이고, 사치스럽고, 잘난 척하는 악 말이다. 노예는 좋음과 나쁨을 뒤집어 자신의 위치에 '선함'을, 주인의 위치에 '악함'을 놓는다. 이제 도덕이 탄생한다. 선과 악의 기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니체는 본문에서 이렇게 쓴다.


노예는 강자들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하고 싶어 한다. 반면 고통받는 자들의 생존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특성들은 각광을 받는다. 연민, 호의, 도움, 온정, 인내심, 성실성, 근면성, 겸손, 친절함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생존의 압박을 견뎌나가는데 유용한 특성이다. 노예도덕은 본질적으로 공리주의적 도덕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선과 악'의 대립 개념의 기원이 있다.

노예도덕에 따르면 '악한' 인간이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인간이다. 권력, 위협적인 것, 세련된 것, 강력한 힘 등이 그래서 악한 것으로 규정된다.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이제 강자와 주인, 지배계급은 악이 되고, 그들이 가진 속성들, 즉 권력, 위협적인 것, 세련된 것, 강력한 힘 등 또한 악한 것으로 규정된다. 반면 복수조차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나약함, 인내, 온순, 희생, 동정심 같은 것들이 미덕이 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여전히 노예인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지배계급과 주인에 대해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도, 소박하고, 겸손하고, 검소하고, 순종적인 선과, 탐욕스럽고, 과시적이고, 사치스럽고, 잘난 척하는 악의 구도, 이 구도는 어딘지 익숙하다.


눈치를 챈 분이 있을 것 같은데, 이 구도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적 도덕과 구도가 같다. 니체는 노예들의, 노예에 의한, 노예를 위한 이 노예도덕을 만들어 낸 배후로 그리스도교를 지목한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신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세상을 창조하고 은총이나 벌을 주는 하느님은 니체에게 있어 유치하기 그지없는 관념이다. 니체는 그리스도적 관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하다고 보고, 예수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서로 구별한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소개한 적이 없다. 예수는 자신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래서 모든 이들은 동등하다고 믿었다. 또한 모든 종류의 싸움을 피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다. 심지어 악에도 저항하지 말라고 한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평화와 온유함, 사랑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라고 한다. 예수는 내세를 약속하지 않는다. 행복은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니체가 보기에는 그래서 '하느님 나라', '천국', '신의 아들', '아버지인 신' 등이 모두 설명을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에 대한 중상과 탄압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고, 분노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사랑하며 죽었다. 즉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실천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예수는 종교적 교리 체계를 남기려 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삶의 태도를 남기려 한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그리스도교로 둔갑시킨 것이 사도 바울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바울이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에 사로잡힌 인물이었으며, 그 원한을 갚기 위해 예수를 이용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가 상징으로 사용하던 '하느님의 나라', '신의 아들' 개념들을 왜곡 사용하고, 예수의 부활을 날조하여 그를 구세주로 격상함으로써 내세와 천국을 만들어냈다.


니체는 영혼불멸, 최후의 심판 등의 개념을 만든 것은 당시의 지배자들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된 것인 한 편,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이기도 했다고 본다. 바울은 이런 개념들을 무기로 대중을 지배하고 권력을 차지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바랬던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태도가 되지 못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갈구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힘, 창조성, 자신감, 자기 긍정, 용기, 명예, 힘, 고귀함을 덕목으로 하지 못하고 소박, 겸손, 검소, 순종을 덕목으로 하는 노예도덕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는 무엇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어째서 노예도덕을 만들어 낸 것일까? 선악이 탄생한 계기는 무엇일까? 니체는 이렇게 쓴다.


기사적, 귀족적 가치판단은 강한 육체, 건강, 전쟁, 모험, 사냥, 춤, 투기와 명랑을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성직자 귀족의 평가 방식은 다르다. 전쟁은 그들에게 가장 불리한 것이다.

성직자들의 증오는 무력함을 기반으로 한다. (중략) 이 지상에서 고귀한 자, 강력한 자, 지배자, 권력자에 대항하여 성직자들은 가치를 철저히 전도시킴으로써 가장 정신적인 복수의 방식으로 보복한다.

(중략)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비참한 자만이 선한 자이고, 가난하고 무력하며 비천한 자만이 선한 자이다. 고통받고 가난하며 추한 자만이 경건한 자이고 신의 축복을 받는 자이며 오직 그들에게만 더 없는 행복이 있다. 이에 반해 그대들, 그대 고귀하고 강력한 자들, 그대들은 영원히 사악한 자, 잔인한 자, 음탕한 자, 탐욕스러운 자, 신을 부정하는 자이고, 그대들이야 말로 영원히 축복받지 못한 자, 저주받은 자, 유죄판결을 받은 자가 될 것이다!'

(중략)

유대인들과 더불어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 시작된다. 이 반란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이 반란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 까닭은 그 반란이 계속해서 승리해 왔기 때문이다.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기사적인 귀족 계급 전투에서 패배하면 자신의 역량이 부족을 인정한다. 심지어 적을 존경하기도 한다. (적을 존경하는 기사에 대해서는 장편 소설 <하얀 로냐프강>을 참고하라) 그들은 나름의 정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반면 성직자 계급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물리적인 힘이 없으므로 정신승리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본문에서 보듯, 고귀한 자, 강력한 자, 지배자, 권력자들을 향해 성직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성직자들이 이렇게 선언하는 순간 세속 사회의 지배자들은 다른 인간들을 억압하는 악한 자들이 된다. 그리고 자신은(성직자는) 민중을 사랑하는 선한 자가 된다. 니체는 이것을 기사적 귀족 계급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자신들이 지배자가 되기 위한 것으로 보고, 그들의 교활함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뒤엎은 판을 니체는 '노예반란'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노예반란이 성공했기에 민중은 거짓된 도덕인 노예도덕을 진리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노예반란이 성공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사회 지도층 사람들이 위선적이며, 도덕적으로 타락했을 것이라고 으레 짐작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정신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건강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부를 쌓은 이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정한 방법을 쓴 적이 없으므로 우리가 윤리적으로 부자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렇다. 니체에 의하면 우리는 정신승리하는 노예인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가 노예라는 것을 모르는가? 니체는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 반란이 계속해서 승리해 왔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매 순간 노예반란이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오늘 신문에서, 뉴스에서 어떤 소식에 가장 주목했는가?


IMG_0178.jpeg 우리는 아주 흔하게 누군가의 도덕성을 고발하는 기사들을 접하며 살아간다


유력한 정치인이 누군가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소식과, 그 정치인이 어떤 법안을 발의했다는 뉴스가 동시에 보이면 당신은 어떤 기사를 클릭하는가? 학식이 뛰어난 대학 교수가 여제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기사와 그 교수의 새로운 우주론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되었다는 기사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기사를 클릭하는가? 어떤 기업가가 사원들에게 갑질을 했다는 기사와 그 기업가의 경영 철학이 담긴 인터뷰가 동시에 보인다면 당신은 무엇을 클릭하는가?


도덕적 비난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도덕적 비난은 쉽게 어떤 사태나 인물에 대한 본질을 가려버린다.


이것이 선거철이면 언제나 네거티브 캠페인과 마타도어 전략이 정책 대결 전략보다 우선시 되는 이유고, 이것이 집권한 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덮기 위해 연예인의 사생활이 폭로되는 이유다. 노예반란은 여전히 승리하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선악이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IMG_0177.jpeg ⓒ 라디오스타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기생충>에 대해서 쓴 한 줄짜리 감상평은 다음과 같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나는 이 문장이 <기생충>을 설명하는 더없이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감상평의 댓글창에는 찬사와 함께 비난의 댓글들이 달렸다. 비난의 논지는 대개 왜 쉬운 단어를 놓아두고 어려운 단어를 쓰느냐는 것이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댓글은 '부끄러운 줄 알라'는 것이었다. 이동진 평론가 스스로도 이 댓글이 인상적이었는지, 이후의 인터뷰에서도 그 댓글을 소개했었다.


이 '부끄러운 줄 알라'는 비난이 바로 도덕적인 비난이다. 누군가를 쉽게 도덕적으로 비난하려고 하는 사람은 노예다. 그것은 현실에서 승리할 수 없으므로 정신적으로나마 승리하려는 노예의 태도인 것이다. 경제적인, 육체적인, 학문적인, 철학적인, 예술적인, 사회에서 어떠한 성취를 하나도 이루지 못한 자도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늘 가능한 것이다. 니체가 노예들의 반란을 폭로한 지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말이다.




이제 <도덕의 계보> 1논문이 끝났다. <도덕의 계보> 2논문은 양심에 대한 것이다. 양을 낚아챈 독수리는 양을 동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비 오는 날 길거리에 주인 없는 강아지가 버려져 있으면 바로 안타까움을 느낀다.


니체는 이 기분, 양심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파헤친다. 우리는 1논문에서 선과 악의 개념을 계보학적으로 파내려 간 결과 선악은 발명된 것이라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2논문에 들어있다. 1~2주 안에 올라올 테니 이 글이 재미있으셨다면 꼭 읽어주시기 바란다.


니체에 대한 다른 글과, 적을 존경하는 기사들이 잔뜩 등장하는 소설을 하단에 링크한다.



https://brunch.co.kr/@iyooha/150

https://brunch.co.kr/@iyooha/154

https://ridibooks.com/books/117600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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