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에세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을 다 읽었다. 이 에세이에 대한 예도 선생님의 13시간 분량 강의도 함께 들었다. 생각보다 좋았었어서 이 에세이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한다. 니체의 문제의식과 이후의 사유들이 이미 이 에세이에 다 들어 있었다. 예도 선생님은 이 에세이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에 대한 선언문이라고 하신다. 니체는 리오타르에 1백 년 앞서 이미 포스트모던을 선취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에세이가 가지는 철학사적 의미와 니체의 기획에 대한 독후감을 써보려고 한다. 다만 니체를 전혀 모르는 분이 이 글을 읽을 것 같지는 않아서, 이 글은 어느 정도 근대 서양철학의 맥락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하고 쓸 것이다. 그래서 다른 글보다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
니체는 이 에세이를 1873년에 집필했지만 생전에 출판하지는 않았다. 이 책은 유고집에 실려있다.
니체의 저작군은 대체로 세 개의 시기로 나뉜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습득한 철학적, 미학적 사유를 발전시켜 나가는 초기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아침놀>(1881), <즐거운 학문>(1882) 등 초기의 사유를 발전시켜 도덕, 종교, 전통을 분석하기 시작하는 중기,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1887), <안티크리스트>(1888) 등에서 계보학적 방법으로 기독교적 도덕과 기존 서구 전통철학들을 급진적으로 해체하며 사유를 완성하는 후기이다.
분류하자면 이 에세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은 초기 저작에 속한다. 하지만 이 에세이에는 데카르트적 주체를 해체하는 니체의 기본 아이디어, 언어 사용이 만들어내는 개념의 한계, 이성이 아니라 몸과 감정, 무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점주의를 존재론으로 확장하는 아이디어들의 뿌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니체는 20대 때 이미 자신의 철학을 거의 완성해 놓고 있었던 셈이다.
니체가 이 에세이를 썼던 1870년대 유럽, 특히 독일은 급격한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격변기였다. 독일제국은 1871년 통일되었고,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산업화와 근대적 국가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었다. 사회적, 정치적 변화는 필연적으로 철학적, 종교적 세계관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데카르트로부터 이어져 온 심신이원론과 칸트-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이다. 데카트르는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내가 나의 육체와 관계없이 존재함을 밝혔고, 독일 관념론은 이성과 절대정신이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궁극적 진리를 획득할 수단이 될 것으로 믿었다.
니체는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에서 이미 데카르트와 독일 관념론의 기획에 대한 강한 회의감을 표시한다. 니체는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물자체와 현상세계의 구도에 놓는다. 니체는 인식되어 인간에게 포섭된 것들, 즉 예술과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실재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았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8절에 이렇게 쓴다.
시는 그것과 정반대의 것, 즉 진리의 꾸밈없는 표현이기를 원한다. 이 때문에 시는 문명인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허위투성이의 가식을 떨쳐 버려야 한다. 자연의 이러한 본래적인 진리와 자신을 유일한 실재로 가장하는 문화의 허위 사이의 대조는 사물의 영원한 핵심인 물자체와 현상세계 전체 사이의 대조와 유사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이러한 회의감은 이데아와 진리에 대한 강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비극의 탄생> 이후 니체는 예술뿐만이 아니라 데카르트와 관념론의 기획, 즉 이성을 꼭짓점으로 하여 개념 일반, 혹은 보편으로서의 진리를 획득하려는 시도 전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밝히는 평생의 작업을 시작하는데, 그 작업들의 시작이 바로 이 에세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이다.
이 에세이의 철학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에세이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니체는 관점주의로 논의를 시작한다.
인간의 지성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서는 어떤 사명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지성은 인간적일 뿐이다. 오로지 인간 지성의 소유자와 생산자만이 마치 세계의 축이 인간 지성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그것을 숭고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모기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 역시 이와 같은 파토스를 가지고 하늘을 날고 있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세계의 중심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
본문에서 니체는 모기를 등장시킨다. 모기는 모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모기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세상, 천정과 벽과 바닥을 구분하지 않는 세상은 우리와 매우 다를 것이다. (우리는 모기처럼 천정에 발을 붙이고 설 수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 모기가 모기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고 경험한다. 이것이 관점주의다.
관점주의는 단지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인다거나, 관점에 따라 각자의 진리가 있다는 식의 소박한 상대주의가 아니다. 관점주의는 존재론이다. 관점주의는 모든 관점은 그곳에서만 보이는 것이 있음을 뜻하는 말이고, 관점을 중심으로 세계가 모두 다시 배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점주의가 존재론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쉬운 예를 들어 보자.
개구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모두를 볼 수 있는 인간에게 이것은 비웃음의 대상인가? 아니다. 개구리의 관점에서는 이 편이 훨씬 유용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인간은 파리채로도 모기를 잡을 수 없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시각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개구리는 그래서 혀 만으로도 모기를 잡을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개구리는 개구리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관점주의다. 이렇게 관점주의는 존재론이 된다.
개구리의 세계에는 움직이는 것만 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인간의 세계에는 인간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관점 앞에서 다시 배치된 것이라면, 이제 진리는 인간 안에 갇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인간을 떠난, 인간을 초월한 보편은 없는 것이다. 설령 진리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에 한한 진리에 불과하다. 플라톤이여, 데카르트여, 그대들이 찾아 헤맨 진리란 이러한 것들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 에세이를 이렇게 시작한다.
그다음으로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언어와 개념이다. 대상과 사물은 일치하는가? 언어의 낱말들은 어떻게 의미를 발생시키는가? 이 질문은 서양철학 2천5백 년의 역사 내내 논의되어 온 질문이지만 이 문서의 범위는 아니므로 자세히 다루는 것은 어렵다. (하단에 의미론에 대해 쓴 글을 하나 링크하겠다) 다만 이 질문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를 하나만 살펴보고 가자.
의미의 발생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는 지시한 대상에서 의미가 발생한다는 견해다. 나뭇잎의 의미는 나뭇잎이 갖고 있고, 인간이 만든 '나뭇잎'이라는 기표(기호로서의 언어)가 그 의미에 대응한다는 견해다. 우리는 대개 이런 방식으로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엄마 무릎에 앉아서, 그림책에 있는 코끼리 그림을 보며 엄마를 따라 '코끼리'라고 말하며 언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체는 코웃음을 친다. 이 질문, 그러니까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본문에 이렇게 쓴다.
개념들이 형성되는 것을 생각해 보자. 모든 낱말은 그것이 전적으로 개별화된 일회적 원체험에 대한 기억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유사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결코 동일하지 않은, 즉 온통 상이한 경우들에 상응해야 함으로써 곧 개념이 된다. 모든 개념은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게 만듦으로써 생성된다. 어떤 나뭇잎이 다른 나뭇잎과 전혀 같지 않은 것이 확실하지만, 나뭇잎이라는 개념은 이와 같은 개별적 차이들을 임의로 단념함으로써, 즉 구별 짓는 차이들을 망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확실하다.
이제 이 개념은 자연 속에는 마치 많은 나뭇잎들 외에 '나뭇잎'이라는 것, 즉 하나의 원형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일깨운다. 이 원형에 따라 모든 나뭇잎은 엮어지고 도안되며 정확히 재어지고 채색되며 주름이 잡히지만, 그것은 미숙한 손에 의해 이루어져서 어떤 표본도 원형의 충실한 모사로서 정확하지도 않고 믿을만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
본문에서 니체는 이렇게 묻고 있다. 개념이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나뭇잎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가능한가?
솔잎, 빨간 단풍잎, 깻잎, 고춧잎이 같은가? 아니다. 그들은 형태적으로, 색상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나뭇잎이라는 범주에 포섭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개별 솔잎은 전부 다르게 생겼다. 완전히 똑같이 생긴 솔잎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솔잎에 '솔잎'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그것들을 포섭한다.
즉 모든 개념은 개념에 포함되는 모든 개체들의 개별적 차이들을 임의로 단념함으로써, 즉 구별 짓는 차이들을 망각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즉 '낱말은 어떻게 의미를 가지는가?' 이 고전주의적 의미론에 대한 질문이, 실은 개념을 구성하는 개별 개체들 간의 차이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동작해 왔음을 은폐하고 있었다는 것이 니체의 분석이다. 세상에 있는 이미 모든 개념들은 실재가 아닌 것이다. 개념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개념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는 수많은 나뭇잎 외에 '나뭇잎'이라는 원형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칸트의 범주이고,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다. 니체는 그것이 폭력에 의한 것임을, 실재를 인간이 멋대로 재단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언어로 옮겨지며 실재를 죽인 결과인 개념이 어떻게 진리일 수 있는가? 이미 허구가 되어버린 개념이 어떻게 진리일 수 있는가? 신이, 이성이, 이데아가 어떻게 진리일 수 있는가? 플라톤이여, 데카르트여, 그대들은 언어의 문제를 결여하였노라.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유동적인 한 무리의 비유, 환유, 의인관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적, 수사학적으로 고양되고 전용되고 장식되어 이를 오랫동안 사용한 민족에게는 확고하고 교의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적 관계들의 총계이다. 진리는 환상들이다. 진리는 마멸되어 감각적 힘을 잃어버린 비유라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해 버린 그런 환상이며, 그림이 사라질 정도로 표면이 닳아버려 더 이상 동전이기보다는 그저 쇠붙이로만 여겨지는 그런 동전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
그렇다면 진리란 대체 무엇인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시적, 수사학적 비유일 뿐이다. 교리적이고 인간적인,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것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 버린 그런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왜 지금까지 이 진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단 말인가? 니체 이전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왜 그렇게 진리에 대해 알고 싶어 했는가? 왜 지금까지 진리가 허구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니체는 이제 진리에의 의지를 정신분석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진실되어야 한다'는, 즉 관습적 비유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책무에 관해서만 들어왔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표현하자면, 확고한 규약에 따라 거짓말해야 한다는,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양식으로 무리 지어 거짓말해야 한다는 책무이다. 그런데 인간은 물론 사태가 그러하다는 것을 잊는다. 그러므로 그는 언급한 방식대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수백 년 동안의 습관에 따라 거짓말을 한다.
인간은 바로 이 무의식성을 통해, 즉 망각을 통해 진리의 감정에 이르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붉다고, 차갑다고, 벙어리라고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감정에서 진리와 연관되는 도덕적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믿지 않고 배척하는 거짓말쟁이의 반대로부터 인간은 진리의 신성함, 신뢰성, 유용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이제 자신의 행위를 이성적인 것으로 설정하여 추상화의 지배에 예속시킨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
지금까지 니체는 진리가 비유에 불과함을, 개념이 개별적 차이를 삭제했음을 잊었기 때문에 진리의 정체를 인간은 의심할 수 없었음을 밝혔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은 진리가 왜 있다고 믿는 것인가? 진리는 허구인데 왜 진리를 향한 진리의지가 있는가? 왜 인간은 진리를 필요로 하는가?
니체의 대답은 놀랍다. 니체는 우리 인간들은 관습적으로 비유를, 즉 개념을 사용해야만 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이유는 도덕적이라는 개념을 수행해야 한다는 어떤 명령이 무의식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하는 정언명령이다. 칸트는 어떤 조건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행위 자체가 선하므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삶의 준칙으로서 지켜야 하는 어떤 도덕적 명령이 숙명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을 때문에 우리는 도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것들이 도덕적인가? 어떤 행동들이 도덕적인 행동인가? 도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개별 행동들이 배치된다.
니체는 이렇게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으로, 관습에 불과한 개념에 개별 사물들과 그 특성을 포섭하려 드는 특성이 있음을 간파해 낸다. 저것은 붉다, 저것은 차갑다, 저것은 벙어리다, 인간은 이렇게 끊임없이 개념을 생산해 낸다.
스스로 개념을 만들어 놓은 주제에 인간은 그 이후에야 진리의 신성함, 신뢰성, 유용성을 사후적,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붉다는 것은 무엇인가? 차갑다는 것은? 벙어리라는 것은? 이제 무의식적 배후가 삭제되고 개념이 이성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이것이 진리의지의 정체다. 이것이 우리가 2천5백 년 동안 진리를 찾아왔던 이유다. 이것이 2천5백 년 동안이나 진리를 찾아왔지만, 그 누구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인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살해하고 지구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개념을 공유하는 능력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저 언덕 너머에 우리의 적(敵)이 있다!" 적은 자연스러운 개념이 아니다. 자연에는 적도, 복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자는 가젤을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처음부터 지구상에서는 인간에게만 주어져 있었다.
이것이 인간이 오랜 시간 진리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종으로서의 사피엔스는 존재하지 않는 진리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인간은 관점주의로서 인간에게 갇혀 있으며, 종으로서의 사피엔스는 개념을 공유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구에 살아남았다. 또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을 획득한 진리를 지금껏 찾아 헤매어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니체의 설명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상정한 이후 2천5백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찾아온 진리는 이러한 것이다. 진리는 허구이고, 환상이며, 시적 수사학적 비유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대체 도덕이 무엇이길래 인간은 정언명령을 가지고 있는가? 왜 우리는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왜 우리는 동정을 느끼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니체의 책이 바로 <도덕의 계보>이다. 니체가 설명하는 도덕의 정체는 진리의 정체만큼이나 정말 놀랍지만, 이미 길어져서 이 이야기는 언젠가 다음에 다른 문서에서 하기로 한다.
내용을 축약하다 보니 니체의 넓은 논의들을 다 옮기지는 못했다. 내가 옮기지 못했을 뿐, 이 짧은 에세이엔 정말 많은 철학자들이 가져간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들어있다.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의 사유는 분명히 니체에게서 출발했다. 뿐만 아니라 이 에세이에서 니체는 프로이트가 없던 시절에 정신분석을 이야기하고, 소쉬르가 없던 시절에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겨우 20대에 불과한 청년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올해 읽기로 한 철학자의 1차 저작은 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 뿐이었다. 내년에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1차 저작을 읽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니체의 주저인 <도덕의 계보>나 <선악의 저편>도 아니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글도 아닌데 이 글을 정말 끝까지 읽은 분이 몇 분이나 될지 궁금하다. (늘 그렇지만 남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쓰는 글은 아니다. 나는 그저 쓰고 싶어서 쓸 뿐이다. 하지만,) 혹시 이 길고 재미없는 글을 끝까지 읽은 분이 있다면 다 읽었다고 댓글 한 줄 달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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